6.25 발발
6.25 전쟁이 시작되고 모든 신학생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갈 수 없었던 신학생들은 친척이나 친구 집에서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7월 31일, 서울에서 인민군들의 의용군으로 나오라는 성화에 견디다 못하고 충청도 예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서울을 떠나 일주일간 걸어가는 도중 인민군을 만나,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하느님께서는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예산에 있던 친구 서원식의 집에서 숨어 있었는데, 인민위원회에서 본래 내가 그 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가끔 찾아오기에 겁이 나서 밤중에 원안나 학생 집으로 피신했다. 그 집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아이들밖에 없었다. 마루 밑에 방공호를 파고 몰래 숨어서 두 달을 견뎠다. 낮이면 방공호 밑에서 숨어살다가 밤이 되면 밖에 나와서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좀 하고 그런 생활을 하다가 9·28 서울 수복 후, 마루 밑 방공호에서 해방되고 서울 신학교로 갔다.
학교에서 몇몇 신학생들을 만났는데 그중 김덕제, 이병만, 이희성, 경갑룡,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입대하게 되었다. 10월 달에 입대해서 12월 성탄 전까지 겨우 두 달 남짓 훈련을 받고 방위 장교 소위로 임관되었다. 울산과 마산에 있던 신병 훈련소에 나누어 배치되어 몇 달 근무했다. 그 때 로마에서 대구교구 신학생 셋을 초청했다. 1951년 전쟁 중에 젊은 사람이 유학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군에 가지 않았던 두 사람(허인 바오로와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미카엘 주교)과 같이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공중에 뜬 비행기만 보다가 촌놈들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니 어리둥절하기만 하고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1951년 8월 13일 지금은 없어진 부산 수영비행장을 출발해서 동경 신학교에 도착하여 2~3일 지나서 8월 16일, 성모승천대축일 다음날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 도착하니 백남익 디오니시오 신학생(전 CCK 사무총장, 대전교구 몬시뇰)이 마중을 나와서 반가이 맞이했고, 가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신학교 별장으로 갔다. 여름방학 중이어서 모든 신학생이 별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가스텔 간돌포는 로마에서 30㎞ 떨어진 피서지이고, 교황 별장도 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처음으로 비오 12세 교황님을 알현하고 천사같은 모습에 황홀했다. 후에 로마에서 다시 알현했지만 참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자니꼴로에 있는 우르바노 대신학교에서 6년간 살게 되었다. 로마에 관해서는 구태여 소개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유명하고 아름다운 곳이어서 특별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로마 우르바노 대학 대학중 백남익 몬시뇰, 류영도 신부, 박정일 주교, 필자(왼쪽부터) 등이 함께 기념촬영 했다.
일상 생활은 이탈리아 말
우르바노(Urbano) 대신학교는 1627년 울바노 8세 교황께서 전교지방 사제양성을 위해 세운 학교로써 유럽에 있는 나라를 제외한 거의 세계 모든 나라의 학생들이 모인 국제대학이다. 예를 들면, 내가 신품 받을 때만 하더라도 51명이 46개국 학생들로 이루어졌었다. 신학원에서는 일상 생활을 이탈리아 말로 하고, 대학교에서는 라틴어로 강의를 들었다. 당시 소신학교 출신이 아닌 나로서는 라틴어는 물론, 배우지도 못한 이탈리아 말도 잘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영어 역시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다고는 하지만 신통한 회화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처음에는 언어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그곳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학년은 올라가고 이제 부제품과 신품을 받을 때가 되고 보니, 이미 로마에 온 지도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