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무렵 우리 가족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가인 큰 외삼촌(정준수)를 따라 만주 해북진으로 이사가게 됐다. 해북진을 택한 이유는 이미 1900년대 초엽부터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2000여명의 한국사람들이 살고 있어 정착하기가 쉬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외삼촌과 아버지는 해북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목촌(善牧村)이라는 조선인 촌락을 만들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을 전부 신자로 만들기로 거대한 계획을 세운 외삼촌과 아버지는 성당 건립을 위해 서울교구의 김선영 신부를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토요일에는 교리공부와 성가연습을 했고, 주일이면 인근 마을 신자들이 성당에서 미사참례후 우리 집으로 모여들어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선목촌 소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미사 때 보미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성당에 가서, 교회박물관에 갔을 때나 볼 수 있는 매우 두껍고 무거운 미사경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미사복사를 섰다. 작은 나로서는 미사경본을 들다가 떨어뜨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행여나 야단맞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내가 넘어져서 아픈 것은 생각지도 않고 열심히 복사를 섰다. 미사가 끝난 다음에 제의방에 들어가면 가끔 신부님이 수고했다고 칭찬도 해주시고, 넘어졌을 때에는 다치지는 않았느냐 말씀하시며 안쓰러워 하기도 했다.
그때 신부님이 칭찬해 주시는 말씀이 너무 좋아서 손이 시려웠던 것도, 책이 무거웠던 것도, 넘어져서 아팠던 것도 전부 자랑스럽기만 했다. 지금도 내가 미사를 드린 다음, 복사서는 아이들을 쓰다듬어 줄 때는 그 시절 생각이 나곤 한다. 「그 아이들도 그순간 행복을 느꼈을까?」하고.
이렇듯 나의 어린 시절은 성당밖에 모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부모님들이 나의 신앙 선생님이 되어 주시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내가 있었겠는가!
4학년이 되어서 작은 외삼촌네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집안의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누군가 한가족이 한국으로 나가야겠다는 친척들과 부모님들의 상의 결과, 작은 외삼촌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나도 외삼촌을 따라 서울로 갔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명동의 「계성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 11살, 처음으로 집을 떠난 새끼새가 어미품을 벗어나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신세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때도 참 추억이 많다. 방학을 맞아 만주로 돌아가던 중 기차에서 떨어져 고생하던 일, 중국집에 살다 툇마루에서 발을 헛디뎌 토간에 떨어진 일 등 많은 추억들이 스쳐 지난간다.
세월이 흘러흘러 벌써 서울에 온지도 3년째, 소학교 6학년이 되었다. 중학교 진학 문제 때문에 어머니께서 서울에 오셨다. 나는 어머니께 교리 경시대회에서 1등한 이야기를 하고(나와 공동 1등을 한 사람은 현재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였다),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던, 지금은 돌아가신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님을 찾아뵈었다. 노대주교님은 어머니께 내가 교리를 잘 한다고 칭찬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께서 흐뭇해 하시는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노대주교님께서 신부일 때 계성국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계셨는데, 그때 내가 계성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었고, 교리시간마다 교리문답을 잘했기 때문에 그렇게 칭찬한 것 같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교회에서 경영하는 동성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당시 교장은 아버지와 친한 장면 박사였다. 한 학년에 두반씩 있었다. 「갑」조는 일반 학생, 「을」조는 신학생이었다. 내가 들어갈 때부터 「을」조는 없어지고 일반학생들만 받았다. 그때쯤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일제 말기에 조선의 가톨릭계 학교뿐만아니라 가톨릭전체가 탄압을 받던 시절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외삼촌 집을 나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명동성당 구내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외삼촌 집이 더 편했지만 기숙사에 가고 싶었던 것은 기숙사가 성당 구내에 있었고, 수녀원에 이모 수녀님이 계셨으며, 1년전부터 누나가 여자 기숙사에 왔기 때문이었다.
기숙사에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식사는 콩깻묵을 섞은 한 공기밖에 안되는 밥에 시래깃국, 김치가 전부였다. 식사 시작후 2분이면 더 먹을게 없다. 아침 식사때 점심도시락을 같이 먹는 바람에 점심시간에는 굶을 수 밖에 없었고 저녁에 기숙사에 와 봐야 먹을 것도 변변찮고…한참 클 때 겨우 이 정도의 식사로 끼니를 잇자니, 참 많이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