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남긴 글은 오늘도 신앙의 향기를 전하며 신자들을 하느님께 봉헌된 삶으로 이끈다. 김대건 성인이 남긴 말씀을 통해 그의 순교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가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순교자의 면모를 오늘에 되살려본다.
목숨걸고 목자없는 조선교회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36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꼭 6년. 약관 22살의 나이로 성장한 청년 김대건은 신학생의 신분으로 감내하기 힘든 또다른 도정에 서있었다. 주님께 대한 열정과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의 힘 없이는 벌써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한 이듬해 산 설고 물 설은 이국 땅에서 병마와 싸우던 형제 이상의 친구 최방제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을 때는 얼마나 얼싸안고 울었던가.
부친 김제준이 기해박해로 순교하고 모친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사명을 받고 오직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은 조선교회를 생각하면서 목숨을 담보한 수천리 험한 길을 자처했던 것이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런 사람들입니다』(루가 8, 21) 성인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 예수의 삶을 닮아가고 있었다.
입국전 부제품 받고 희망 가득
# 「눈이 사방에 깊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너무나 지루하여 묵주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을 떠나 읍내로 향하는데, 발자국 소리마저 없게 하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저는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와 근심에 억눌려 기진맥진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거름더미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1845년 3월 27일 서울 한양에서. 조선교구 총대리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
「드디어 페레올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모시고 올 수 있겠구나」
조선 입국을 위해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 소팔가자를 떠난 게 12월말, 그러나 더 감내하기 힘든 건 매서운 추위보다도 감시의 눈초리였다. 유학에 오른 지 10년, 조선 입국을 위해 만주에서 동분서주한 지 4년만에 꿈에 그리던 귀국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의 귀국은 화약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입국 전인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의 가슴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조속히 조선에 목자들을 보내시어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우리를 이루게 되길」 원하는 간절한 희망으로 벅차 오르고 있었다.
곳곳에 도사린 위험 때문에 자신의 입국 사실을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한 대건의 심정은 형용하기가 힘들었다.
이땅의 복음화에 모든 것 바쳐
# 「(한양으로 이송되는 도중에)많은 백성이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마치 외국인처럼 잡혔습니다…편지로 인해 제가 당한 문초를 생각할 때 이번에는 큰 박해가 일어날 것입니다…저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846년 7월 30일 옥중에서. 은사 신부들에게 보낸 열아홉 번째 서한)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가 돼 입국한 뒤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황해를 통한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던 중 1846년 6월 5일 서해의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된 김대건 신부. 해주 황해감영에서 서울 포도청, 의금부를 거치면서 40여 차례에 달하는 문초와 모진 고문으로 수척할 대로 수척한 김대건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힘을 믿고 있었다.
대건은 박해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본받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옥중에서 그는 순교의 용기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구했다.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심문하는 관장을 향한 대건의 말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박해자까지 사랑으로 감싸안는, 완덕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는 대건의 노력은 옥중세례 등을 통해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순교에 이르는 길이 갑작스런 사건이 아니라 많은 기도와 준비를 통해 이루어진 영적 삶의 결실임을 보여준다.
착실히 살아 천국서 만나자
#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성인 성녀의 발자취를 본받아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이며 양아들임을 증거하라」 (1846년 8월 말 옥중에서. 김대건 신부가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
「주님, 이끌어 줄 목자없이 또 다시 버려질 당신의 양들을 지켜주소서」. 10년에 걸친 공부를 어머니의 땅에서 9개월 정도밖에 펴보지 못하고 스물여섯의 풋풋한 젊은 꿈을 접어야 할 찰나, 눈앞에 닥친 죽음 앞에서도 대건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그 무엇을 찾아내 신자들에게 전해주려 하고 있었다.
혹독하게 가해지는 육체적 고문, 홀로 남겨진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이라는 본능적인 유혹…. 숱한 유혹 속에서 김대건은 이승에서의 작별인사와도 같은 편지를 담담히 써내려간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한 걸음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음을 대건은전하고 싶었을까.
▲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연극 '솔뫼의 샛별 김대건 신부' 공연 가운데 순교장면.
◇ 김대건 신부 연표
▲1821. 8. 21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남
▲1836. 4.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 후보로 발탁
▲1837. 6. 7 마카오 도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수학
▲1844. 12. 부제품 받음
▲1845. 8. 17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1845. 9. 28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과 함께 제주도 표착
▲1846. 4. 13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서울로 출발
▲1846. 5. 14 페레올 주교로부터 선교사들의 서해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명 받고 교우들과 마포 출발
▲1846. 6. 5 서해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됨
▲1846. 6. 21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1846. 9. 15 반역죄로 사형선고 받음
▲1846. 9. 16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
▲1846. 10. 26 이민식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1857. 9. 23 가경자로 선포됨
▲1925. 7. 5 시복됨
▲1984. 5. 6 시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