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행동이 좌우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담배가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흡연가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담배를 피웁니다.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담배를 계속해서 피우는 이유는 니코틴 중독과 더불어 그러한 정보에 대한 인식 때문입니다.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낀다면 좀 더 쉽게 담배를 끊을 것입니다. 강하게 느낄수록 금연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고 혹은 사실이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신빙성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면 금연은 힘들게 됩니다. 단순한 정보, 인식과 느낌 없는 앎은 행동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 1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복음을 묵상하기 전에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직업과 가족에 대한 귀한 정보를 먼저 소개합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입니다. 여기서 목수라는 말은 주로 목수, 석수, 건축 기능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자렛 시골에서의 목수 생활의 가난과 고난, 다른 한편 그분의 완전한 자기 낮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이 표현은 이스라엘 언어 관습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 요셉이라고 해야 하는데 어머니 마리아를 언급한 것은 이 때 이미 요셉은 돌아가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그 어머니를 마리아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가장 오랫동안 문제가 제기 되어온 부분입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의 용법에 따르면 친 형제를 가리킬 수도 있고, 사촌들과 가까운 친척들을 가리킬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톨릭에서는 4촌 혹은 육촌 동생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개신교에서는 친동생들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마리아의 동정성이 거짓임을 보여 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아무리 싸워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보다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보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태도를 참조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마리아의 동정성과 예수님이 외아들임을 주장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친형제들이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마리아의 동정성을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입증하는 간접 증거입니다.
어떻든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고향을 방문하여 회당에서 가르치는데 처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놀랍니다만 곧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직업과 가족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앎이 믿음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여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교훈은 섣부른 앎과 선지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이 같은 경험은 생활 속에서 너무나 자주 되풀이 되는 경험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이유로 「주위에 있는 타인」을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타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의 말과 의향을 나의 앎으로 미리 판단하여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편견과 전이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만이 우리를 한 단계 더 성숙 시킬 것이요, 신앙에서도 진일보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교훈은 방관자적인 지식은 결코 신앙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땅마저 「성지」로 추앙받는다면 예수님과 함께 생활 했다는 그 사실은 정말로 굉장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신앙의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왜일까요!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분의 기적과 가르침에 대해 느낌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앎이 문제였습니다. 섣부른 앎,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머리에만 머무른 방관자적인 지식이 결국 나자렛 사람들의 축복을 신앙의 장애물로 변모 시킨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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