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님 소임으로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4년이 지나갑니다. 밥상이 그냥 차려지는 줄, 콩이면 콩 하난 줄 알던 서울 놈이 논에 들어가 피 뽑아 낼 줄 아는 걸 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나 봅니다. 줄맞추어 모를 심으니까 줄 사이에 있는 다른 풀들은 쉽게 멜 수 있지만 벼 옆에 찰싹 붙어 벼와 비슷하게 생긴 이 놈의 피를 뽑는 일은 초보자로선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지요.
제 일이 이런 피 뽑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것들, 진짜 옆에 붙어있어 진짜인줄 알고 지내다보면 결국 진짜마저 죽게 만드는 것들…귀찮고 성가시지만 함께 힘을 합쳐 우리 눈을 가리우는 헛 껍데기들을 걷어내자고 외치는 일….
먹을거리에 관해 우리 주위의 진짜는 무엇입니까? 단지 농민의 이윤을 위해 땅이야 산성화돼서 죽건 말건 제초제며 화학비료, 온갖 농약을 뿌려대며 강제로 땅으로부터 작물을 생산해 내는 일, 이건 약탈이지요. 땅에 대한. 그것을 거부하는 농민들이 있습니다. 땅에 몸붙여 사는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살기 위한 생명농법을 지켜내는 농민들이 진짜 아닙니까? 요즘 농약 안치고 어떻게 농사 짓냐는 비아냥 속에서도, 비록 못생기고 벌레들이 나눠 먹은 작물이지만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생태계의 순환을 지키려는 이들의 땀과 한숨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희망이지요.
손에 돈 들고 언제든지 슈퍼에 가면 싱싱한 척, 맛있는 척 땟깔 곱게 차려입은 온갖 제 철 모르는 작물들 과일들의 알뜰한 유혹 앞에서 생명농산물을 찾아 나서야하는 불편함을 참는 주부들이 있습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든, 아토피 걸린 아이를 위해서든 시작이야 다양하지만 생명의 눈을 뜨는, 그 수고스러움을 마다 않는 주부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있기에 오직 돈만이 지배하는 이 냉혹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도 정직한 노동이 신뢰 속에서 교환될 수 있지요.
김형! 진짜끼리 만나기가 이리 어렵군요. 불편함이 두렵기조차 한 이 세상 안에서 진짜를 찾으려는 수고스러움만이 뻔히 아는 우리들의 정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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