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소개사업(疏開事業)만 하다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건강도 나빠지고 때로는 단체로 식중독에 걸리기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보름동안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집으로 향했다. 사실 그 식중독 덕에 집에는 빨리 갔지만 해방 후 만주에서 한국까지의 피난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해북진에 내려 선목촌으로 가는 마차를 탔다. 항상 다니던 길, 깡산 언덕에 도달하자, 저 멀리 보이는 선목촌은 정말 아름다웠다. 만상이 푸른색 벌판에 검붉은 초록색의 버드나무 성을 이룬 선목촌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신비의 나라」와도 같았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이 들판을 가로질러 굽이쳐 흐르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풍경은 마치 한폭의 산수화도 같았다. 이런 목가적인 7월말, 만주의 농촌 풍경을 시인이 보았다면 뭐라고 표현했을까!
해방의 기쁨
식중독 덕택이 집에와서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간의 경성생활 이야기도 다 나누기 전에 엄청난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패망」과 「해방」.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나는 선목촌에서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으셨고 다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걱정하셨다.
큰누님과 셋째 누님 가족, 그리고 친척 몇분이 조선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떠난 다음날 선목촌에 중국사람들이 습격을 했다. 이 중국사람들이란 구만주국군들로, 그들은 일본에도 중국에도 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하며 특히 조선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습격해서 물건을 약탈해 가곤 했다. 그들이 선목촌도 습격한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그들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알리 없는 아버지가 누님가족들을 조선으로 보내기 위해 하얼빈으로 나왔을 때 선목촌을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면서 집집마다 약탈했다. 이때 어머니와 막내동생 마르타가 총에 맞아 운명했다.
습격당한 선목촌
20여명의 집중사격을 당한 우리 집은 어디 한곳이라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한쪽 벽에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있던 성모성심상본과 예수성심상본을 넣어둔 액자만 유리 한 장 깨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한다.
▲ 김영환 몬시뇰(오른쪽 아래)과 가족들.
“당신 뜻 이루소서”
집에 돌아온 아버지께서는 『하느님, 우리 집안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저희를 당신 품에 거두어 주시어 돌보아 주십시오. 살아있는 아이들이 다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잡아주시고 이 고통을 통해 우리 집안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다.
만주로 이사온지 10여년, 비록 고향은 아니었지만 행복하게 잘살아왔는데…이제 이런 상황속에서 만주를 떠나게 되었고, 이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삶이란 그리 평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다섯 나이, 내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일을 당할 수 있었겠는가! 남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우리 어머니는 안 돌아가실 줄 알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다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것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생각지도 못한 일이 닥치고 만 것이었다. 이런 것인 인생인가! 어찌 슬프다는 말로 그 때 그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 감정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같이 있겠다는 마음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룩한 일에 투신 다짐
『엄마, 나 지금부터 항상 엄마하고 있을게. 그리고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요셉 성인과 약속하신 것, 내가 꼭 지킬게. 엄마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천당에서 도와주어야 돼. 엄마 사랑해』하면서 어머니께서 주신 목걸이를 확인하고 정거장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요셉 성인에게 『아들을 낳게 도와주시면, 훌륭한 사제가 되게 아들을 키우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다져나가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다. 사제가 되어 어머니의 소망도 이뤄드리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거룩한 일에 이 한 몸 투신할 것을 거듭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