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만주땅에 묻어둔 채 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은 귀국해서 고향인 대구에 가고, 나는 계속 공부하기 위해 서울 명동 성가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그 시절, 어지러웠던 세상사를 어찌 설필(舌筆)로 다 이야기할 수 있으리요! 36년간이나 식민지 생활을 했던 조선, 남의 손으로 독립의 길은 열렸지만 사회질서가 잡히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한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조선천지가 공산주의와 민주진영으로 갈라져서 말할 수 없는 혼돈 상태에 빠져 있었고,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사상문제로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혼돈…혼돈…혼돈…
어른들의 사회는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들 역시 무슨 사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었겠는가! 너는 공산주의이고, 나는 민주진영이라고 서로 싸우며 타협할 줄 몰랐다. 해방이라고 되고 보니, 미국과 소련은 남의 나라 한 가운데 38선이라는 줄을 긋고 우리 민족끼리 서로 왕래도 못하게 하고 서로 적대시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그때 좌우익 싸움은 말할 수 없는 사회혼동으로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세월은 흘러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었다. 비로소 내 인생의 길을 확정지을 때가 온 것이다. 기숙사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미사에 복사를 섰고, 그때마다 중국에서 어렸을 적 복사를 서던 생각도 났다. 그리고 언젠가는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품었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노대주교와 앞길 상의
잘 알고 지내던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가 나의 앞길에 대해 상의하면서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때 노대주교님께서는 『네가 신학교에 들어간다니, 참 반갑게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외아들이고 또 대구교구 소속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대주교님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졸업 후 대구에 와서 최주교님께 말씀드렸더니 참말 반갑다고 하시며 『순교자 집안이나 다름없는 너희 가정에서 신부가 난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우냐?』고 하셨다. 집에 와서 아버지께 인사드렸더니 뜬금없이 『너, 신학교 간다며?』 하시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 노대주교님께서 대구 최주교님과 회의차 만났을 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최주교님께서는 대구로 돌아오셔서 아버지께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들었다. 어차피 아버지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하시자 오히려 일이 쉽게 풀렸다고 생각되었다. 그후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그래, 신학교 갈래?』라고만 말씀하셨다.
시간은 흘러 신학교에 입학할 날이 가까워 오자, 내 마음은 급해져만 갔다. 입학하기 사흘 전, 비로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신학교에 가도 좋다고 허락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신학교 가거라. 신부가 되려면 착하고 열심한 성인 신부가 되어라. 그리고 남의 사정을 헤아려줄 줄 아는 어질고 너그러운 신부가 되고, 주교님에게 순명하고 교회에 성실한 신부가 되어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겠다고 수시로 말했었고,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좋아하시면서 『참말 그랬으면 오죽 좋겠느냐』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다.
라틴어 공부 시작
어렵사리 허락을 받고 1950년 4월 30일 서울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정규만 학장신부님이 반가이 맞이하면서 『대구교구 소속이지?』하시며 서울교구에서도 소신학교 출신이 아닌 김희선 학생이 오전에 입학했다고 하셨다. 총급장인 김수환 신학생(김수환 추기경)을 부르더니 학교 사정을 잘 가르쳐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 시간부터 신학생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침실과 연학실의 자리를 배정 받고 여러 가지 신학교 내규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 이튿날부터 최석호(바오로) 신부님으로부터 김희선과 나, 둘이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달 남짓 공부를 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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