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방 「한미요 배씨토가」에서 푸레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배요섭-연식 부자.
56년만에 옹기 명장
열다섯 살 되던 해 처음으로 흙을 만졌다. 그리고 56년이 지난 72세 때, 그러니까 1999년에 서울시 중요 무형문화제 제30호로 지정됐다. 「옹기 명장(名匠)」이 되던 날, 평생을 옹기장이로 지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삶과 하나로 포개졌다.
육십 평생 흙을 빚으며 옹기장이로 살아온 배요섭(요셉.76.서울 신내동본당) 옹과 노동부 지정 푸레도기 전승기능자인 그의 아들 배연식(바오로.48)씨 부자.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푸레독」을 만들 수 있는 「진짜 옹기장이」들이다.
이들의 가족사는 우리 나라 옹기 역사 자체다. 무려 5대째 200여년 간 가마에 불을 지피왔기 때문. 병인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어 신앙을 지키며 옹기를 굽기 시작한 배옹의 증조부 배치봉(베난시오) 옹이 1대. 그 뒤를 배옹의 아버지 배순용(로렌조) 옹이 이어 받았고, 배옹도 옹기장이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옹기장이가 됐다.
질감 좋은 점토를 찾아 산 속을 헤맸고, 우마차로 흙을 날랐다. 땔감 나무를 베고, 불가마 앞에서 며칠씩 밤을 지새기도 했다. 어깨 너머로 배운 독짓기가 제법 모양새를 내면서, 어느덧 옹기는 그의 삶에 있어 전부가 되었다.
배옹은 『옹기 굽는 일을 하느님이 주신 천직으로 알고 받아들였다』고 했다. 어른들로부터 물려 내려온 일이다 보니 조상들이 고생해 이뤄놓은 일을 나몰라라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배옹의 다섯 아들들은 아버지와는 상황이 달랐다.
플라스틱 용기가 쏟아져 나오고, 김치냉장고가 등장하면서 옹기장이의 입지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1974년 일어난 「납옹기 파동」은 배씨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다섯 형제가 옹기장이의 길을 걷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대를 이으려 하지 않았을 때, 차남 연식씨가 제대로 옹기일을 해 보겠다고 나섰다. 연식씨는 『장인정신이 강한 아버지가 때로는 너무나도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문득 아버지의 삶과 철학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궁금해졌다』고 털어놓았다.
푸레독을 완성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덤벼들었다. 옛날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라도와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흙을 발굴, 채취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고집스럽게 흙을 고르고, 반죽하고, 물레를 돌렸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3년에 걸쳐 구워낸 독들은 모조리 박살이 났고, 뒤따른 경제적 궁핍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 수공예 수레타법으로 푸레독을 빚고 있는 배요섭옹(앞)과 배연식씨.
대를 이은 장인 혼
때려치우겠다고 마음먹기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피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마음을 비웠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흙덩이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봤다. 가마 속의 불덩이가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도기 「푸레독」. 선대를 거쳐 내려온 장인의 혼은 그렇게 다시 한번 이어졌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한미요 배씨토가」란 상호로 공방을 세운 연식씨.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전통 생산 방법인 수공예 수레타법으로 푸레도기 생산에 본격 돌입했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옹기와 빗대기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넉넉한 외모에서 자유분방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예리한 눈매와 굳은살 박힌 거친 손마디에선 혼이 담긴 고집스러움도 배어있다. 선대의 옹기가 살아 남기 위한 숙명의 선택이었다면, 그의 옹기는 열정을 더한 예술적 작품인 것이다. 아버지 삶의 전부였던 옹기가 이젠 연식씨 삶의 의미가 됐다.
공방 ‘한미요 배씨토가’
옹기장이 부자의 공방 「한미요 배씨토가」는 작업장은 물론 전시장까지 갖췄다. 값은 시중의 자기에 비해 약간 비싼 편이나 가족과 함께 방문해 푸레도기가 완성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볼 수도 있다.
이제 연식씨는 아버지의 손을 닮고 싶어한다. 아버지와 조부, 증조부가 그랬듯이 자신도 옹기장이의 길을 조심스레 다짐하고 자녀들도 내심 그렇게 커주기를 바란다. 아비의 소망을 알았는지 도예를 전공하는 연식씨의 딸 은경(엘리사벳.21)씨와 새롬(글라라.19)씨도 혼불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배옹도 단 하나의 바람이 남았다. 『흙으로 사람을 빚은 하느님도 옹기장이가 아닙니까. 꿋꿋하게 이 길을 걸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젠 이 목숨 다 하는 날까지 「우리 것」의 소중함을 후세에 전하는 일에 힘 써야죠』
화려하지도 매끄럽지도 않지만 서민들의 애환과 정감 서린 푸레도기. 배씨 부자의 작업장에는 연중 내내 가마의 불꽃이 사그라들 줄 모른다. 흙과 불과 혼이 빚어내는 조화는 오늘도 계속된다.
▧ 「푸레독」이란
유약과 잿물 입히지 않고 1300도에서 80시간 구워
「푸레독」은 유약이나 잿물을 입히지 않고 섭씨 1250∼1300도에서 약 80시간 동안 장작가마에 구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옹기에 자연스럽게 재가 달라붙고 녹아내려 자연스러운 빛깔의 도기가 탄생하게 된다. 잘 구워진 푸레독은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표면이 덮어진 후 녹색의 재유가 형성되는데, 녹색의 재유가 검정색 바탕에 어울어지면 표면이 약간 푸르스름하게 보여 「푸레독」이라 명한다.
「푸레독」은 습기 배출 능력이 좋고 반대로 산소투과율이 좋아 예로부터 쌀독, 찜통, 밀가루통, 콩나물시루 등으로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주로 사용됐다. 「푸레독」은 또 방수 효과는 물론 물의 정화능력이 뛰어나 독에 보관한 물질은 오랜 시간 그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 「푸레독」에 곡물을 담아 놓으면 신선한 맛이 오래도록 유지되며, 꽃을 꽂아 놓아도 유리나 사기 화병에 비해 몇 배 더 수명이 오래 간다고 한다.
지금에 이르러서 「푸레독」은 실용적인 면보다는 예술적인 면에서 극찬을 받으며 소장하고픈 옹기로서의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찾아 가는 길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151 소재. 경춘가도를 달리다 남양주시 마석에서 수동면 방향으로 우회전 후 직진한다. 수동유스타운길로 우회전 후, 청평 방향으를 약 1.5㎞를 가다 보면 처음 만나는 삼거리에서 「한미요 배씨토가」 안내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 곳에서 좌회전 후 약 200m 정도 진입하면 된다. ※문의=(031)594-0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