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5년 귀국한 필자(가슴에 꽃단 이)가 환영나온 가족들과 기념촬영(위).
발령소식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이기수 신부님께서는 연만하신 분이시니 잘 모셔야 한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나이가 들면 이유 없이 슬프니, 옆에서 잘 보필해 드려야 한다…이기수 신부님은 열심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신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신부로서 사목일선에 서게 되었고 앞으로 어른을 모시고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부임했다. 이기수 몬시뇰과 같이 살면서 웃지 못할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이러하다.
칠성동 근처에는 제일모직, 대한방적 등 섬유공장이 많았다. 그래서 3부 교대로 일하는 여공들이 성당 근처에 많이 살았다. 신자 여공들은 젊은 신부님도 왔으니 매주 수요일마다 사람들을 모아 교리를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바라는 바이고 매일이라도 좋으니 사람들을 많이만 모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자 여공들이 서른 명을 모았으니 다음 주 수요일부터 교리를 시작하자고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선 본당 신부님께 허락을 맡아야 하니, 제안한 신자 여공들에게 본당신부님께 미리 말씀을 드리라고 했다. 본당 신부님을 찾은 그들은 십 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얼굴이 울상이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본당 신부님이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오냐. 이제 젊은 신부가 오니까 마귀가 꼬리를 살살 흔드는구나』 하시면서 『교리는 내가 가르치면 되지! 김신부는 교구 학생지도 신부라서 바빠서 안 된다』하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때야 그들이 울상이 된 이유를 알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교구 학생지도를 하다 보니 자연히 전화도 잦다. 그런데 이기수 신부님 혼자 계실 때는 한 달 전화요금이, 기본요금 200원에 사용료 200여 원, 도합 400여 원이 전부였는데, 내가 온 후 한 달 전화요금이 2500원이 넘었다. 그러니 신부님께서 가만히 계실 리 만무하다. 자진해서 내 방의 전화를 반납하고 『본당 신부님께서 전해주시는 전화만 받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에 지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신부님을 항상 성인신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참말 열심한 분이셨고, 교회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훌륭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 1966년 고성동 본당 보좌시절 신영세자와 함께한 필자(앞줄 가운데). 필자의 옆은 이기수 몬시뇰(아래).
한번은 대구대교구 학생 성소 피정 때 어떤 학생이 『신부님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신부가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던 이문희(바울로) 대주교님은, 내가 광주 신학교 학장일 때 맞이한 은경 축하식 축사에서 『김영환 베네딕도 신부는 바보스럽게 신부가 무엇이 그리 좋다고 다시 태어나도 사제가 되겠다고 했답니다』라고 좌중을 웃겼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사목 생활은 활기에 넘쳐 있었고,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생각과 무엇이든지 맡겨지면 다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내 마음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구의 모든 액션단체를 총괄하라는 명을 받고 교구청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