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지역주의 문제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로 대표되는 두 지역간의 감정싸움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벽입니다. 아마 이러한 지역감정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그 하나의 원인은 자기와 관계된 무엇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가지는 인간의 욕구와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가 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사제로서 이곳 저곳에서 사목을 하게 됩니다만 그 지역마다의 독특한 특징들을 가끔씩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자연스런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차이가 아니라 그 차이를 해석하는 자신입니다.
나와 다른 부분이 발견될 때,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먼저 나의 뜻을 앞세워 해석해 보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해석이 반드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해석에 감정이 실리고 어느 지역이나 집단과 해석을 연결시키게 되면, 한 인간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모습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인 지역감정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부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차이를 감정적 차원으로 처리하고 그것이 시댁과 친정이라는 하나의 집단이나 출신 문제로 연결시키게 될 때 부부사이는 돌이 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모든 사람이 나와 똑 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욕심을 버리고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거기에 더하여 집단과 지역에 연결된 편견을 가지고 어느 한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 때 우리는 좀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다음주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밝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빵이다』라는 말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9, 12), 『나는 선한 목자입니다』(10, 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11, 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 6)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는 자기 계시의 말씀으로 요한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라는 것은 한마디로 그분은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받드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적인 양식을 취함으로써 지상 생명을 유지해 가듯이 신앙인들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의지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44절).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이끌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면서 동시에 이 기쁨에 우리의 이웃들도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이웃을 예수님께 초대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든 이러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만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라며 웅성거립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적 기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하늘에서 올 수 없다는 그럴듯한 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 속에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편견을 보게 됩니다. 막말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이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활동 했다면 그 때도 군중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러한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나자렛(이방인 지역으로 천시 받던 지역임)출신이요, 부모와 그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사실이 이 같은 반응에 많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고, 결국 그 사실이 군중을 신앙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출신과 지역, 그리고 직업을 가지고 한 인간을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고발인 동시에 눈에 보이는 사실을 넘어서는 진리를 보기 위해 인간의 편견과 고정 관념을 넘어설 결단의 눈이 필요함을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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