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동 본당에 부임한 지 채 1년도 못 되어 1966년 12월 24일, 성탄절에 대구대교구 가톨릭 액션단체 지도신부로 임명받고 교구청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교구청 옛 목조건물에 불이 나서 건물이 타 없어졌기 때문에 대건중학교 별관으로 쓰던 교실 몇 개를 빌려 교구청으로 쓰고 있었다. 겨울이면 난방장치도 없어서 방 하나당 석유 두 되로 하루를 견뎌야 했고 여름이면 선풍기 한 대로 지내야 했다.
그때는 교구청에 대주교님, 총대리 신부, 사무처와 경리를 겸한 당가신부, 그리고 나까지 네 명이 전부였다. 사무실에는 사무원 두 명, 타자수 한 명, 전화교환 한 명, 허드레 심부름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주방에는 수녀님 한 명과 부엌일 하는 사람 두 명, 수위까지 합해야 1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교구청에는 본관, 별관, 숙소, 수십 개의 방에 20여 명의 신부와 1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예산 없이는 일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당시 액션단체를 위한 단 한 푼의 예산도 직원도 없이 신부인 나 혼자, 침실 겸 사무실인 단칸방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졌다. 나는 그때 예산을 청해야 되는지, 예산이 있어야 일을 하는지 조차도 몰랐다. 다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고 돈이 없으면 돌아다니며 선배신부들에게 도와달라고 떼를 썼고, 어렵지만 이것이 지도신부의 역할인 줄로만 알았다.
액션단체라고 말만 했지,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그나마 오스트리아 신부인 「루디」가 와서 가톨릭학생회를 조직하고 가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갑수 신부(전 부산교구장)도 외국에서 돌아와서 주교 비서 겸 액션단체를 지도하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다음이라 세계적으로 가톨릭액션이 활기를 띠고 있을 때였다.
대구에서 내가 학생회를 맡았을 때도 모든 것이 초창기였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재미도 있었다. 학생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일주일에 몇 번씩 회합을 열고 액션에 대한 강연을 했다. 수요일, 토요일 학생들과 개개단체별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니, 참말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이 모여들었다.
또한 개개의 액션단체가 나름대로 활동을 했으나 이들을 하나로 묶는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모든 액션단체를 조직화하는 액션 단체 협의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협의회」라는 것은 각 단체 간부들끼리 모여서 교구의 행사나 일년 동안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하고 협의하는 회의였다.
어른들 단체는 자금이 필요해도 스스로 해결하지만, 학생들 단체는 하나에서 열까지 돈이 들면 지도신부가 만들어내어야 했다. 예를 들면, 여름 방학을 기해서 대학생 체육대회를 하게 되면, 그때 돈으로 적어도 5~6만원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만질 수 있는 돈이라고는 미화 1달라(270원짜리) 미사예물 30대분이 내 수입의 전체였다. 그러니 내가 흔히 한 말로 8100원을 손에 들고 쥐었다 놓았다 몇 번 하면 다 없어졌다. 당시 담배도 피웠었고, 술도 먹었고, 학생회 간부들에게 자장면도 사주었는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기만 하다. 돈 드는 행사를 1년이면 몇 개씩 치루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재미만 있었다.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일을 소개하자면, 1966년 8월 22일부터 28일까지 있었던 「제1회 하기 연구주간」 때의 일이었다. 연구주간이란 우리가 원하는 연사를 모시고, 오늘날의 학생들이 교회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강연을 듣고 토론, 토의, 발표도 하는 세미나이다.
첫 연사로 초빙된 김수환 추기경(당시 마산 교구장)께서 하시는 첫 마디 말씀이 『여러분들의 초청을 받고 교실에 들어오면서 현수막에 「제1회 하기 연구주간」이라고 씌여진 것을 보았습니다. 대구에서 제1회 연구주간이 열린 것이라면 마산의 제1회 연구주간은 언제가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셨다. 대구대교구는 매사에 앞서간다는 칭찬의 말씀이라 이해하고 기분이 좋았다.
액션단체 지도신부가 되고부터는 수시로 전국 회의에 참석했는데, 특히 서울대교구 학생회 지도신부는 선배였지만, 서울 위주로 모든 일처리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방교구도 배려해달라고 싸우기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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