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대구관구 지도 신부인 신상조 신부님과 정달용 신부님, 나, 이렇게 셋이서 우선 만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상의를 했다. 신학원 장소는 계산동 성당에 있던, 지금은 없어진 2층 강당을 사용하기로 하고, 비품은 각 수녀원에서 각출해서 의자, 흑판 등을 장만하기로 했다.
초창기에는 신상조 신부님과 정달용 신부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강의를 도맡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도 있었고, 강사도 보충이 되었다. 이문희 대주교님께서도 그 당시 보좌신부로 계시면서 강의하셨고, 이성우 주교대리 신부, 고(故) 김경환 몬시뇰도 한 시간씩 맡아 강의를 하셨다.
원래 이 신학원은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운영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신학원 운영을 시작한 다음에 서대주교님께 수도원에서 맡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자, 서대주교님께서는 직접 나에게 수도원으로 넘겨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대주교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대주교님 뜻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런 대화가 있은 다음, 수도원에서는 대명동에 집을 짓고 축성식 때 축사에 한국진출기념사업으로 수도원에서 신학원을 운영하겠다는 것을 발표했다. 이것을 밝혀두는 이유는 신학원이 처음부터 수도원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대구대교구에서 시작한 것을 나중에 수도원에서 운영하도록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운영은 수도원에서 하지만, 우리는 계속 강사로 남아 있었다.
이문희 대주교님은 그 당시 유학에서 돌아와서 동촌본당 신부로 계시다가 청주교구 파 주교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대주교님의 명을 받고 청주에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청주는 신부가 많이 모자랐다고 들었다. 그때 대구는 액션단체를 내가 맡은 후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연히 도움이 필요했고 누군가 보조를 맞추어 한다면 훨씬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서대주교님의 친서를 가지고 이문희 신부가 다시 대구로 돌아오도록 청주 파주교님께 전권대사로 갔다.
이문희 신부가 돌아온 다음, 우리는 참말 재미있게 액션단체를 이끌었다고 자부한다. 지금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신자들의 호응이 좋았고, 교구 전체가 활기를 띠는 것을 느꼈다. 예산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행사를 치루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했었다.
▲ 대구대교구 가톨릭 액션단체 지도신부 시절인 1966년 6월 대구 칠성동 JOC 회원들과 함께 했다. 앞줄 가운데가 필자.
그것만이 아니라 1969년 꾸르실료 단기 피정도 도입하였다. 꾸르실료는 그 당시 서울에서만 시행되고 있었던 것을 이해남 교수의 권고로 지방에서는 대구대교구가 먼저 시작하였다. 현재 남성 꾸르실료 190차, 여성 꾸르실료 168차에 이르렀다. 또한 혼전 교육이 부족하여 이혼이 잦다는 말도 있어 1967년 가나강좌도 도입하였고 현재 320차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문희 신부는 군종으로 입대하고 나도 서울 주한 교황대사관에 파견근무로 서울에 갔다. 서울대사관에서의 나의 임무는 한국어를 모르는 힐라리오 로똘리 대사님을 위해 각종 신문, 잡지 등의 중요한 기사를 번역하는 것이었고, 또한 교황 대사님께서 교구 방문시 수행하며 통역하고 주교님들이나 신부님들의 뜻을 대사님께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추기경님과도 긴밀한 연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시로 서울대주교관에 드나들었다. 그때 추기경 비서인 장익 신부(현재 춘천교구장 주교)와 자주 만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