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외방전교회본부 고문서고에 소장돼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의해 드망즈 주교의 사후 처음으로 원본 형태로 한국 신자들에게 모습을 선보이는 「드망즈 주교 일기」는 교회 유산일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 교회사의 중요한 자산이다.
일기 원본 반입을 계기로 드망즈 주교의 삶과 그를 둘러싼 역사를 되돌아보는 장을 마련한다.
▲ 가톨릭신문이 창간 60주년을 맞아 국내외 최초로 기념자료집 형태로 번역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87년 6월 20일 간행).
가톨릭신문이 창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86년 8월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번역을 위촉해 이듬해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처음으로 생생한 모습을 선보인 「드망즈 주교 일기」는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의 발간을 비롯해 교회를 둘러싼 역사의 흐름도 함께 살필 수 있게 한다.
발간 당시 「드망즈 주교 일기」는 지난 196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교구 문서고에 소장돼있던 사료 대부분을 잃어 역사에 목말라하던 대구대교구뿐 아니라 근대 한국교회의 역사와 근대 민족사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 내용과 구성
총 1307쪽에 달하는 프랑스어로 된 원문 「드망즈 주교 일기」(Journal personnel de Mgr. F. Demange)는 드망즈 주교가 죽음을 앞둔 1936년 12월 31일 자신이 기록해온 일기를 5년 단위로 한권씩 묶어 총 5권으로 분류해 오늘에 전한다.
「조선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1906년 창간 때부터 내가 경영해온 교구의 신문인 「경향신문」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때는 오전 8시였는데, 나는 막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사진틀을 짜려고 하던 중이었다. 주교님은 『주교님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며 나를 포옹하고 손에 들고 있던 전보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일기는 이렇게 드망즈 주교가 1911년 4월 23일 대구교구장 주교로 임명받은 날부터 선종하기 2개월 전인 1937년 12월 6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부였을 때는 일기를 쓰지 않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장 임명 후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교구의 최고 책임자로 교구에 관한 공적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 내용 대부분이 개인의 신변잡기보다 교구에서 일어난 사실과 사건에 관한 공적 기록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특히 드망즈 주교는 훗날 일기가 공개돼 역사적 자료로 쓰일 것을 예견했음인지 사목활동 관련 사진은 물론 신문기사나 명함, 관련 서류를 첨부해 일기의 불충분함을 보완하는가 하면 선교사들의 서한을 분류해 번호까지 매겨놓는 치밀함을 보였다.
1911∼1915년까지 역사가 담긴 제1권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 성직자들의 지침서인 「대구교구 지도서」를 반포하고, 주교관과 성 유스티노신학교와 명도회관,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원 등 주요 시설을 차례로 건립해 가는 과정을 비롯해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의 지역경계선 조정 과정 등 대구교구의 기틀을 마련해 나가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제2권(1916∼1920)은 1919년 한국교회 사상 최초로 교구 신학생 2명을 로마에 유학보냄으로써 유능한 한국인 사제 양성에 정성을 쏟는 모습이나 성직자들에게 연중 주일의 강론 자료와 강연회의 프로그램까지 제공하는 등 교육의 절실함에 눈을 뜨고 투자를 아끼지 않은 드망즈 주교의 사목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제3권(1921∼1925)에는 신자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선남방천주공교 청년회」를 조직해 대사회적으로 가톨릭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안동본당 등 여러 본당을 신설해 교세 확장을 위한 기반도 다져나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교세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를 담고 있는 제4권(1926∼1931)에서는 1927년 청년회 기관지로 가톨릭신문의 전신 「천주교회보」를 창간, 언론을 통한 가톨릭 운동을 선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1931년 5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합쳐 「전라감목대리구」로 설정하는가 하면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한국교회 공의회에 참석,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리서 발간 계획을 세우고, 교리서 편찬을 위한 교구 위원회를 설치하는 일을 주도하는 등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발걸음을 살필 수 있다.
제5권(1932∼1937)에는 드망즈 주교가 자신의 지병이 악화되는 것을 알고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독립된 교구를 맡기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1937년에 전라북도 지역에 최초의 한국인 교구인 「전주지목구」를 탄생시키면서 전라남도 지역은 「광주지목구」로 승격시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했다.
심한 장염과 간질환으로 고통을 겪던 드망즈 주교는 1937년 12월 6일 「다음 해를 위한 강연 프로그램과 무엇보다도 「주일 강론집」 발간을 알리는 회람 제125호를 보냈다」는 글을 마지막 일기로 남겼다.
▲ 사제수품 은경축을 맞은 드망즈 주교(제일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기념미사후 뮈텔주교를 비롯 참가한 성직자들과 기념촬영(「드망즈 주교일기」 1923년 6월 26일자).
▲ 한국교회 자립을 위해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독립교구를 맡기는 작업을 추진한 드망즈 주교가 초대 전주지목국장으로 임명된 김양홍 신부와 함께 대구 성모당에서 기념촬영(「드망즈 주교일기」 1937년 5월 2일자).
■ 역사적 가치
「드망즈 주교 일기」는 대구교구의 창설에서부터 교구의 기반을 잡아가는 초창기 27년간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어 대구대교구사를 서술하는 데 「1차 사료」다.
일기는 드망즈 주교가 대구교구에 부임한 후 임시 주교관 마련을 시작으로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양성, 기성 성직자 교육사업을 시행하면서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교구 성직자들의 지침이 되는 「대구교구 지도서」를 펴내는 등 교구의 기틀을 마련해 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증언하고 있다.
일기는 또 대구교구에서 분할 독립한 전주 광주 부산 마산 안동 제주교구의 전사(前史)연구의 기본자료일 뿐 아니라 근대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료다.
특히「드망즈 주교 일기」는 드망즈 주교가 사목방문을 하며 남겨놓은 사진을 비롯한 800여장의 「사진 자료」가 함께 첨부돼 있어 당대 신자들의 삶과 신앙상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근대 교회사, 특히 부족한 일제시대 교회사에 관한 사료를 보완할 수 있다.
◆ 드망즈 주교의 삶과 업적
대구교구 기초 확립…한국교회 자립에 헌신
천주교회보.잡지 창간 등 계몽운동에도 열성
한국명 안세화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드망즈 주교는 1875년 4월 25일 프랑스 알사스주 로렌지방에서 태어났다. 파리로 이주한 후 생 쉴피스 신학교와 파리가톨릭대학, 파리국립대학에서 수학한 드망즈 주교는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낯선 땅 한국으로의 문을 열어 놓았다. 1898년 6월 26일 스물셋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은 드망즈 주교는 한불수호통상조약(1886)으로 신앙의 자유가 싹트기 시작한 조선교구 선교사로 임명돼 그 해 10월 8일 한국땅을 밟는다.
1899년 5월 조선교구 부산본당 신부로 한국에서의 첫 사목활동을 시작한 드망즈 주교는 1900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임명돼 이후 6년간 봉직하며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취임한 그는 개화기 애국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1911년 4월 8일 경상.전라 지역을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드망즈 주교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초대 대구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대구대목구는 신자 2만4694명의 교세로 18개의 본당, 391개의 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16명과 한국인 사제 5명이 전교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1938년 2월 9일 선종까지 선교사로서 40년, 대구교구장으로 27년을 재임하면서 대구교구의 기초를 확립함은 물론 한국교회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 드망즈 주교(둘째줄 중앙)가 대구 성유스티노 대신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드망즈 주교일기」1923년).
이와 함께 교구장 부임 때부터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독립된 교구를 맡길 것을 결심한 드망즈 주교는 대구교구 설립 후 25년만인 1937년 전라북도 지역을 전주지목구로 승격시켜 최초의 한국인 교구로 설정하는가 하면 전라남도 지역에 광주지목구를 설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