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주교님의 명을 받고 서울에 있는 주한 교황 대사관(Apostolic Nuntiature)에 부임했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묘한 데가 있다. 교황대사관에서 일하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 1969년 당시 주한 교황대사 히뽈리또 로똘리 대주교의 마산교구 방문때 함께한 필자(오른쪽 꽃든 이).
제5대 안토니오 델쥬디체(Antonio del Giudice) 대주교님은 제2차 공의회 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공의회 전 기간동안 대주교님을 보필할 기회가 있었다. 델쥬디체 대주교님은 고향이 나폴리이고 대주교님의 친정 집에 여러 차례 갔었다. 델쥬디체 대주교님은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의 첫 대사였다. 제2대 대사가 바로 히뽈리또 로똘리(Hipolito Rotolli) 대주교님이었다. 로똘리 대주교님께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사제를 대사관에 근무하게 하고, 한국 신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가지고 싶어 하셨다.
대구에서 액션단체 지도신부로 있을 때에는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했다.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몰랐고 오로지 액션단체 회합을 위해서만 뛰었다. 그런데 서울 대사관에서는 일어나서부터 잘 때까지 지극히 단순한 일과였다. 미사를 지내고, 세끼 식사 외에 개인기도, 그 외에는 종일 사무실에서 지냈다. 액션단체 지도신부로 있을 때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생활이어서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너무나 단조롭고 맥없는 일과였다. 그러나 가끔 지방교구 순시 때, 주교님들이 교구 나름의 어려운 사정을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할 때는 참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잠깐, 대구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될 때 대구의 신암동 본당과 포항 죽도본당 신부(파리 외방전교회 소속)가 안동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본당 두 개에 신부가 부재하게 되었다. 그때 대사님께 『대구에 본당이 비니 어떡하겠습니까?』 하며 대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서대주교님께서도 쾌히 대구교구로 도로 올 수 있으면 좋겠다 하셨고, 포항으로 가고 싶다는 나의 생각을 받아들이셨다.
1957년 12월에 신품을 받고 그간 공부만 하다가 1969년 8월 5일, 처음으로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때 포항지구에는 죽도성당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본당으로 된 열 곳은 모두 공소였다. 교적상 신자 수는 2000명 가량 되었는데, 죽도성당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합해서 230~260명이 전부였다.
주일헌금은 고작 1000여원밖에 되지 않았고(당시 맥주 한 병 값이 240원이었다), 부임해서 본당에 와보니 부서진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침실에는 침대, 옷장, 부엌의 집기는 양은 솥 작은 것 하나, 양재기 셋, 숟가락 하나, 젓가락 두 쌍 반(그러니 다섯 개), 연탄은 온 것 하나에 반파 두 개…. 사제관 전재산이라고는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문마다 문고리는 빠져 있어 잠글 수 있는 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제일 중요한 성당에는, 변변한 제의 한 벌 없었다. 감실에 있는 성합은 도금이 벗겨져 얼룩덜룩 지도를 그리고, 성합 뚜껑의 꼭지도 부러지고 없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몰랐다. 물론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맨주먹밖에 아무것도 없었고, 주일 헌금마저 밥 한 끼 사먹기도 힘든 액수이다 보니,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당장 먹을 쌀도 없었다. 어제까지 본당 신부님이 살고 계셨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신자들에게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성당 마당의 풀은 내 키를 넘기고 옛날에 성당으로 사용했다던 강당은 비가 새고, 유리창은 여기저기 깨지고, 전체 분위기가 마치 폐허같았다.
이런 사실을 포항 예수성심시녀회에서 알고 밀가루 두 포대를 보내주었다. 그것으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칼국수를 해먹었는데, 하루에 두 끼 국수만 먹다보니 물려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