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과 시대적 배경
17세기말 프랑스는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혼란과 가난으로 비참했다. 특히 전 국민의 90%를 넘는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불행했다.
삶을 유지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요건도 미흡했을 뿐더러 더욱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황폐함이었다. 교회와 신자들은 유리돼 있었고 사람들은 신앙과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을 잃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이 가야할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존재했던 전통적인 수도회들은 수도자적인 엄격한 교육으로 인해 새롭게 요구되는 봉사활동의 범위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방문회」가 창설되어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들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회법이 여자 수도자들의 방문 활동을 금지함에 따라 봉쇄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1625년 「애덕의 딸 수녀회」를 시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 병자 간호, 어린이들의 교육이라는 민중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의 수도회들이 시작됐다. 여기서 「애덕」은 봉쇄수도원의 관상과 고행에 대비되는 자선활동으로서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활동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봉쇄 수도회의 벽을 넘어 여성들이 아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길」이었으며 흡사 사도 바오로가 유다인의 벽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구원의 소식을 전한 것과 비견될 수 있는 놀라운 변화였다. 새로운 수도생활의 형태는 프랑스 전체에 비상한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프랑스 전역에 교육과 병자 간호에 봉사하는 자매들의 공동체들이 급속하게 확산됐다.
프랑스 영성학파
나아가 이들의 활동은 17세기 들어 새롭게 일어난 영성적 쇄신의 자양분을 한껏 흡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들어 프랑스에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됐고 이들은 소위 「프랑스 영성학파」라 불리우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 사목자, 선교사들이었다.
이 학파는 피정과 재교육을 위한 세미나 등을 통해 사제들을 복음화하고 신자들을 교육했으며 신학교를 열었다.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복음과 함께 바오로 서간에 깊이 심취한 프랑스 영성학파는 영성적 쇄신을 이끌어냈으며 16세기 전멸된 「가톨릭 생활」이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도록 지도했다. 당시의 영적 토양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즉 교회 생활의 모든 국면, 곧 전례, 신학, 철학, 전교사업 및 영성 등에서 이 프랑스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강한 추진력과 방향을 제시받았던 것이다.
수녀회의 창설과 루이 쇼베 신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창설자인 루이 쇼베 신부는 프랑스 교회가 「복음화」의 꽃을 활짝 피우는 바로 이러한 영성적, 사목적 흐름 속에서 양성된 사제였다.
쇼베 신부는 지극히 평범한 본당 사제였으나 경건하고 학식과 사목적인 면에서 훌륭하게 균형잡힌 인물이었다. 그는 본당 신자들을 돌보면서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환자들, 교육받지 못한 어린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우리의 사도직 첫 터전은 주위에 산재하고 있는 마을들이었다. 우리의 첫 사명은 여아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다른 공동체들 뒤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회칙 초안 제1장)
1696년 작은 마을 르베빌라 슈나르의 본당 신부였던 그는 처음으로 마을 처녀 4명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중 마리안 드 티는 2대 원장이자 수녀회의 공동 창립자로 간주된다. 귀족 출신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열정으로 수녀회를 위해 헌신한 마리안 드 티는 아무런 문서도 남겨두지 않은 루이 쇼베 신부를 대신해 자신들의 정신을 이렇게 요약했다.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친다.』
이렇게 창립된 작은 공동체가 점점 자라나 확산되기 시작했고 쇼베 신부는 이를 샬트르 교구에 위탁했다.
그리고 1708년 샬트르 교구는 이들을 받아들어 공적으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란 이름을 주었다.
이후 수녀회는 국제적인 수도회로 성장해 28개국에서 복음화의 꽃을 피우고 있으며 한국에는 1888년에 진출한 이후 1966년 서울 관구와 대구 관구로 분리돼 교육, 의료, 본당 및 해외선교, 사회복지, 특수사도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96년에는 창설 300주년을 경축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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