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이 들어서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부자도시로 손색이 없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찢어지게 가난한 어촌도시였다. 이조시대에는 원래 잡범들의 유배지였다고 당시 시장이었던 백아무개에게 들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50여 년, 내가 부임하고도 30년이 넘은 포항은 그 당시 죽도 성당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11개의 성당이 넘는다. 포항 출신 신부만 하더라도 10여 명. 예수성심시녀회의 총본부가 있는 곳. 그리고 많은 부자신자들이 살기도 하는 곳이 바로 포항이다.
내가 부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주일헌금이 1000여 원 밖에 안되던 곳이, 성당마다 수천 명의 신자들을 헤아릴 수 있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때 부임해서 우선 복사단을 조직하고, 부인들을 모아 성모회와 크리스타회, 또 남자 청년회와 교리반도 여러 개 만들었다. 내가 지도하는 지성인반과 수녀가 지도하는 일반신자와 부녀자를 위한 교리반이 두 개 있었고, 학생들을 위해 학생 교리반과 학생회를 조직하고 또 성가대를 조직하고 젊은 여성들을 위한 특별 교리반도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져 폐허같던 본당이 왁자지껄 사람이 모이는 동네가 된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사람소리가 끊이지 않는 성당 마당이 되었다.
▲ 성모회, 크리스타회, 남자 청년회, 교리반을 만들어 신자들이 본당에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성가대 회원들과 함께.
또 하루는 어떤 신자가 일이 있어 당분간 성당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하기에 『성당에 못 올 사정이 있으면 할 수 없지요』하고 대답했더니, 그 다음주일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으면서 그 사람 말이 『나는 본당 신부에게 냉담 허가를 받았으니 성당에 안나가도 된다』라고 떳떳이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종교를 미신과 크게 구별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점 같은 것을 보고도 하느님께 미안한 생각도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소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두 본당으로 승격되고, 수천 명씩의 신자가 있는 굴지의 본당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신자수가 10여 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공소들이었다. 어떤 공소는 신부가 방문한다 해도 겨우 공소집 사람만 있었고, 일이 있다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던 곳도 있었다. 승용차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반 시외버스, 몇 시간에 한 대 밖에 없는 만원 버스를 타고 수녀, 복사 그리고 나 셋이서 당지에 도착하고 보면 미사가방이 모두 찌그러지고 구두도 밟혀서 온갖 자국이 다 남았다. 그때가 벌써 30년이 훨씬 넘었다.
포항본당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사람이 죽어서 묘지로 가는 길인데, 묘지로 가는 길이 없어서 상여를 멘 사람들이 논두렁으로 가다가 남의 논을 푹푹 밟고 가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만 하더라도 군에서 대민사업이라고 하여 군장비를 일반사람들에게 빌려주었는데, 당시 해병대 군종으로 계시던 장태식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기지사령부에서 불도저를 빌렸다. 그리고 그 불도저로 산주인 허가도 없이 남의 산을 깎아 길을 내던 것을 생각하면 무모하다 할까, 철이 없다고 할까,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지금, 그 길에 자동차가 다닌다고 한다.
10여 년 동안 포항 죽도 본당에는 프랑스 신부님께서 계셨었다. 그러다가 내가 부임함으로써 한국 신부가 온다고 신자들이 그렇게 좋아했었고 나 역시 본당 신부로서 첫 부임이었기에 신자들과 몹시 정이 들었지만, 1년 남짓 후 다시 대구 계산본당으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