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 역사상 아주 독특한 2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한국교회는 우리 선조들 스스로의 힘으로 창립된 교회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신앙의 씨가 뿌려지고 성장해 갑니다만 우리는 다릅니다. 어떠한 이방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을 통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가 뿌려졌고 성장해갑니다.
그리고 초기 50년 동안은 중국인 사제 두 명이 짧은 사목 활동을 했을 뿐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사목자없이 평신도들만으로 신자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 참으로 자랑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독특한 모습은 「가성직제도」입니다. 이는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를 허가권자의 허락 없이 임의로 집행했던 제도입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87년 경까지 북경에 가서 직접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베드로)에 의해 교회 발전책으로 제시되어 채택된 제도로 이승훈 권일신 및 10여 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을 받지 않은 채 사제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성사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던 제도를 가리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선조들의 무지로 볼 수 있습니다만 어떻든 이러한 가성직제도는 세계교회에서 우리 한국교회만이 가지는 아주 독특한 역사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분들 중 103명의 위대한 순교 성인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성인의 숫자는 세계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베트남에 이은 네 번째로 많은 수입니다. 신앙을 숫자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만 어쨋든 자랑스러운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우리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과거의 영광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자랑스런 역사의 후손들로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 듯 합니다.
먼저 복음은 자아부정과 십자가의 수락을 요구합니다(23절). 여기서 자아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종에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일차적 의미는 「순교」입니다. 그러나 루가는 이를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로 고쳐 씁니다. 이는 생활 가운데서 나날이 당하는 고통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고통의 문제. 신비입니다만 인간이 고통을 접하는 첫 반응은 회피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회피를 통해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비록 힘들지만 우리가 나름대로 고통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고, 신앙적으로는 「고통의 이면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를 고통의 의미부여와 고통을 하느님과 연결하기로 알아들어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4절). 인간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많은 것, 즉 선과 진리 그리고 양심과 정의를 포기합니다. 그 이유는 지상 목숨에 대한 욕심과 나약한 의지가 그 원인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욕심의 절제와 굳센 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타협 없는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과 「현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준틀이란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재물과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금언입니다(25절). 세상의 재화는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생명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이 순서가 물구나무선다는 것입니다. 즉, 재물이 목적이 되고 삶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삶과 재물이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와 순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재물을 신격화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26절의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실존적인 태도, 즉, 「지금 여기」에서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끄럽게 여긴다는 표현은 「떳떳하지 못하다」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좌절과 실망」이라는 개념을 포함하는 말인데, 「지금 여기」 나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진다면 종말에 똑같은 모양으로 보상받는다는 동태 보상률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가 되고, 신앙인들이 현재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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