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인명 피해와 재산피해로 실의에 빠져 있는 수해민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자연 재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이 이러한 자연 재해를 더 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자연 재해는 크기의 차이는 있으나 매년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방이 힘들고 매년 인재라는 항의가 끊이지 않는 것은 불가항력이라는 면도 있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부처 이기주의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부처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일들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재해방지라는 목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집단 이기주의가 더 앞섭니다. 감사원에서 지적했듯이 하천관리는 건교부, 농업시설은 농림부, 재해 구호는 복지부에서 맡고 있고 자연재해 대책 위원회는 행정자치부가 관장하는데 각 부처는 행자부의 업무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재해 대책이 총괄 조정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업무 분리는 견제와 전문지식의 활용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합 조정되지 못하고, 각 부처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재해방지를 뒷전으로 미룬다면 이러한 업무 분리는 비효율성과 예산 낭비만 가져올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인간이 가진 좋은 일에 대한 애착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 가운데는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좋은 일에 대한 욕심, 다시 말씀드리자면 내만이 그 좋은 일을 했으면 하는 독점욕 같은 재미난 심리를 발견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나만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독점욕의 표출로 인해 그 일의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날 때 입니다.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재해 방재라는 공공의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 비근한 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욕에 사로잡힌 대표적인 집단은 종교입니다.
종교는 구원과 사랑 인간의 행복을 가르치는 어쩌면 가장 의미 있고 좋은 일을 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우리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좋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우고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구원과 진리라는 종교의 본 목적이 좋은 일을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와 이익이라는 현실원칙에 입각한 편협한 집단 이기심에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인간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 보면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비교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가로막았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사실 요한의 이러한 태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예수님과 삶을 같이 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장점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개인의 잇속을 챙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거짓 교설을 전달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아마 요한은 이러한 점이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적어도 예수님만은 우리가 독점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독점 의식을 넘어설 「선의의 마음」이 요한의 본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 여겨 보고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요한의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말리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도에 대한 거부로 들립니다. 요한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태도와 부정적 독점의식에 대한 거부 뿐 아니라 어쩌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호해야한다는 선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심도 포기하라는 요구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독점의식 뿐 아니라 충성심과 열정이라는 선의의 독점의식마저 버리고 대범하고 개방된 구원관을 가지라는 요구요, 하느님과 예수님은 누구의 손에 의해 독점될 수 없다는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그 생각과 말과 처신이 예수님과 닮았다면 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현대 가톨릭 신학계의 통설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대범함과 포용력 다양성 이라는 영원한 이상을 속 좁은 우리에게 묵상의 주제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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