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천년기를 마치고 제3의 천년기에 접어든지 이미 3년, 세기와 천년기를 넘나들며 인류의 평화와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발걸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평화의 사도, 생명의 수호자로서 교황은 로마 바티칸의 안락한 궁전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노구를 이끌고,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심장부 뿐만 아니라 사막과 정글의 오지, 포연 가득한 전쟁터의 한가운데까지 티끌만큼의 주저도 없이 길을 나섰다.
자신이 저술한 책의 제목처럼 「행동하는 인격(人格)」으로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위 25년 동안 무려 102회에 걸쳐 131개국을 순방하면서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그리고 그 평화의 실현을 위한 순례는 실제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겨진 평화를 향한 열망을 일깨움으로써 지구촌에 화해와 평화의 물결을 일렁이게 했다.
세상은 그의 이러한 참여와 행동의 신념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 체제를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이탈리아계 교황 탄생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미 교황으로 선출되던 때부터 「평화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부여받은 듯하다. 1978년 10월 16일 오후 6시 18분, 흰 연기가 시스틴 성당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전통적으로 새 교황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이 신호에 맞춰 전세계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뜨거운 환호 속에서도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된 카롤 보이티야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으로 당시 크라코프 대교구를 맡고 있던 추기경이었다. 1523년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교황 이후 무려 455년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계 교황, 그것도 공산국가 출신의 추기경이 세계 교회를 이끌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것은 현대 교회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 안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후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는 찬미 받으소서』라고 외친 새 교황의 모습을 본 신자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둘로 나눠진 인류를 일치시키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해외순방 끊이지 않아
공산권 국가 출신의 교황은 당시 냉전 체제 아래에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였고 실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서 냉전의 빙하를 녹이는데 실제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1979년 즉위 이듬해에 교황은 6월 2일부터 8일 동안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국가인 모국 폴란드를 방문하고 이어 83년과 87년 두 차례의 추가 방문에 나섰다. 교황은 89년 1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세기적 만남을 통해 반목과 냉전의 시대를 청산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교황은 다시 90년 4월 또 다른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고 당시 하벨 체코 대통령은 『교황의 체코 방문은 기적』이라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환영했다.
교황의 해외 순방은 거듭됐다. 98년에는 역사적인 쿠바 방문에 나섰다. 「이뤄질 수 없는 꿈」으로 여겨졌을 만큼 지난했던 쿠바 방문은 냉전을 종식하고 동유럽을 세계 무대로 이끌어냈던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쿠바는 이로써 세계에 문을 열었다. 그에 앞서 교황은 97년에는 4월과 5월에 레바논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을 잇달아 방문했고 대희년에는 성지를 방문해 「세계의 화약고」 중동지역의 평화 정착을 위한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교황은 그 와중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기도 했다. 81년 5월 13일 저격범의 흉탄에 쓰러진 교황은 두 번에 걸친 대수술과 93일간의 입원, 그리고 장기간의 요양을 필요로 했다.
92년에는 소장에 생긴 담석을 제거하는 수술, 94년 5월에는 숙소에서 넘어져 해외 순방을 연기해야 할 만큼 심각한 수술을 받아야 했다.
▲ 평화를… 2000년 대희년 중동지역 방문 때, 교황이 예루살렘의 서쪽벽(통곡의 벽)의 갈라진 틈새에 기도문을 넣은 뒤 십자가를 긋고 있다.
건강 기원하며 함께 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교황은 초인적인 의지로 다시 일어서곤 했다. 고령에 파킨슨씨병과 관절염 등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세계를 무대로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바라보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함께 그의 건강을 허락해달라는 기도를 바치곤 했다.
제삼천년기의 문을 연지 수해가 지났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금도 세상에 그리스도의 항구한 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여전히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중동, 아프가니스탄, 최근에는 대규모 테러와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져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라크 전쟁 등등.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이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안에 하나의 형제로서 평화를 이룰 때 해외 순방에 나서는 교황의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워질 듯하다.
■ 아직도 밟지못한 땅
평화의 사도로 세계 곳곳을 누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이지만 아직도 방문하지 못한 곳이 있다. 특히 이 나라들은 교황이 오랫동안 방문하기를 염원해온 곳이라는 점에서 여건이 허락된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순방에 나설 곳들이다.
그 하나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 순방은 교황의 가장 열렬한 희망이다. 엄청난 인구와 복음화의 잠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마 남지 않은 공산국가인 중국 순방은 특히 제삼천년기, 아시아 교회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더 절실한 과제가 됐다.
그에 못지 않은 순방 대상지가 러시아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고르바초프, 옐친 등 전 대통령들이 교황의 방문을 여러 차례 요청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여건이 마련됐지만 러시아 정교회측의 반대로 지금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한때 국내 언론에서 교황의 방문 가능성이 과장되기도 했던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보다도 오히려 더 방문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여겨졌었으나 남북 정상의 만남 이후 어쩌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앞서 방문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이들 국가들은 교황이 아직 방문하지 못한 곳이면서도 교회사적으로나 국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방 대상지들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교황 방문을 위한 물밑 작업이 여러 차례 진행돼 왔지만 번번이 중국측의 강경한 입장으로 무산되곤 했다. 특히 최근에는 교황청이 중국 성인 120명을 시성한 문제와 관련해 사정은 더 악화됐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문제는 교황청의 주교 임명권을 둘러싼 논란이다. 중국 정부는 교황의 주교 임명권을 부인하고 정부가 임의로 주교를 임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문제가 복잡하다. 정교회는 러시아에서 가톨릭을 위시한 다른 종교들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고 정부에 압력을 가해 차별적인 종교 정책 시행을 조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톨릭 주교가 추방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교황의 순방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러시아 정교회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필수적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한국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 통계로 본 재위 2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있었던 지난 25년 동안 교회의 모습은 큰 변화와 성장을 나타냈다.
우선 신자수가 크게 늘었다. 2001년 교황청 통계에 따르면 1978년 7억5700만명에서 10억6000만명으로 40%가 증가했다. 흥미로운 건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삼세계의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무려 150%, 아시아는 80%의 증가세를 보였다. 반면 유럽은 불과 5% 성장에 그쳤고 최근에는 신자수 자체가 줄고 있다.
교회 사도직 종사자의 수도 160만명에서 280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주교는 3600명에서 4600명으로, 교구 사제는 2001년말 현재 26만 6500명으로 25년 전보다 8000명이 늘었다.
하지만 수도회 사제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15만8000명에서 13만9000명으로 줄었고 수사는 7만5000명에서 5만5000명으로 줄었다. 수녀는 98만5000명에서 79만2000명으로 크게 줄었다.
선교사들의 수는 줄어든 반면 지역의 교리교사수는 엄청나게 늘었는데 78년 17만 3000명에서 무려 280만명으로 증가했다. 평신도 선교사는 2001년말 현재 13만9000명을 기록하며 대부분 남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다.
종신부제는 5500명에서 2만8000명으로 늘었는데 그 절반이 미국에 있다.
한편 신부 1인당 신자수는 1800명에서 260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가 운영하는 의료, 복지 시설들은 6만4000개에서 10만 6000개로 늘었고 교육시설도 크게 늘었는데 특히 가톨릭계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수가 200만명에서 무려 460만명으로 늘어났다. 교황청의 고위 관리직의 경우 78년에는 20개 교황청 최고위 부서의 책임자에 절반 이상이 이탈리아인이었으나 지금은 그 중 4개 부서만 이탈리아인 성직자가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