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안타까웠던 수마의 흔적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데, 가을 하늘은 예전의 가을 하늘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높고 파랗다. 각양의 그림을 그려내는 구름의 부지런함을 감탄하며 오랜만에 파란하늘을 바라본다. 가을 산과 들도 파란하늘에 질세라 나름대로 저마다의 옷으로 뽐내며 패션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산등성 자락과 정겹게 연결된 집들, 감나무가 있어 멀리서 바라다보면 주황색 꽃잎이 떠 있는 듯 하다. 감 수확을 서두른 집 감나무에는 까치에게 밥으로 줄 나무에 매달린 여 나무개의 남은 감에 정겨운 주인의 마음을 짐작한다. 넉넉한 마음과 미소가 보고만 있어도 절로 생긴다. 이 평화로운 가을의 풍경을 빛누리 작은 마당에서 감상한다. 그것도 체중과 바람에 영향을 받아 흔들리는 감나무 위에서….
이러는 사이에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아우성이다. 『이모, 저쪽이요. 이쪽에도 있어요. 조금만 손을 뻗어보세요!』 날 잡은 토요일 오후, 태풍에도 굴하지 않고 늠름히 자란 감들을 수확하였다. 다양한 모양과 색, 그리고 크기가 우리 아이들처럼 다양하다. 사람이 양쪽에 잡고 있어도, 한 두 계단을 오르다가 무섭다고 내려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그만 되었다고 해도 열심히 꼭대기까지 올라가 어쨌든 한 개라도 더 따 보겠다는 아이까지 모습이 제각각이다. 감들을 주워 모으니 큰 소쿠리에 그득하다. 작년에 비하면 대풍이다. 따면서 신선한 단감 맛을 보는 것도 재밌다.
대 여섯 개의 감이 담길 만한 소쿠리를 펼쳐놓고, 그중 크기와 모양이 나은 것들을 골라 담아 이웃들과 나누려 한다. 아이들은 나눌 예쁜 감을 고르고, 수건으로 반질반질 하게 닦으며 신났다. 닦아 반짝이는 감 소쿠리들이 소담스럽게 줄을 섰다. 딸 때는 볼품이 없었는데 정성껏 닦고 담으니 그럴 듯 하다. 독백처럼 「태풍에도 살아 남고, 병충해에도 견디어 낸 기특한 것들, 정성껏 손질을 하니 그 우여곡절이 간데 없구나!」
아이들의 아픈 기억 속의 체험과 상처는 태풍과 병충해처럼 불가항력(不可抗力)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생활 속에 크고 작은 문제를 만든다. 긍정적일 때도 있지만 대게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불필요한 가지를 쳐주고, 땅에 떨어져 터지거나 익어서 방치되지 않게 제 때에 수확하고, 닦아주고, 담아주는 정성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함께 산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방문하신 은인들과 봉사자, 순찰 중인 경찰관 아저씨께 단감을 대접한다. 가을의 풍요로움 그 자체이다.
방문하신 분들의 정성과 사랑은 아이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해주고, 아이들이 튼튼하고 실한 열매가 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아 전하고 있다. 감나무에 달린 크고 작은 열매, 그것은 우리가 사고, 만들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상(無償)으로 받은 선물인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임」께서 주신 소중한 열매가 아닐까 싶다. 입 안 가득 달콤한 단감 맛에 기분도 달콤해 지는 듯 하다. 기분이 좋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이 계절에 우리 모두 『정고심비(情高心肥)』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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