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월 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마더 데레사의 시복식을 거행한다. 시복식을 맞아 그의 생애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되새겨본다.
지난해 12월 10일 교황청은 마더 데레사와 관련된 기적을 인정하면서 세상을 떠난지 불과 5년 3개월만에 그를 복자로 선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데레사 수녀의 시복 청원인인 사랑의 선교 수사회 브라이언 콜로디예추크 신부는 『시복식이 이렇게 빨리 이뤄진 것은 이미 데레사 수녀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거룩한 헌신과 높은 명성 때문』이라며 『이미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살아 있는 성녀」로 불렀다』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주십시오”
▲ 데레사 수녀가 1940년경 로레토 수도회에서 찍은 사진. 데레사 수녀는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할 때까지 로레토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그녀는 평생 동안 「가난」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부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적다』고 확신했고 물질적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 모두가 함께 가난을 나눌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마자 상금으로 받은 19만 달러는 즉시 나환자 수용소 건설 자금으로 쓰여졌고 축하연도 취소했다. 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캘커타를 방문한 뒤 선사한 흰색 리무진도 즉시 팔아 서벵골의 나환자 수용소 건립에 사용했다.
한국을 세 차례 방문한 마더 데레사는 81년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에도 비행기를 내려섰을 때 허름한 수도복에 성경책, 묵주, 그리고 잿빛의 헝겊 가방만이 굵게 마디진 손에 들려 있었다.
담 너머 가난을 외면할 수 없다
데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Skopje)에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본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uxha Bejaxhiu). 18살 때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에 들어가 이듬해 캘커타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 가서 20여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수백만명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담 너머의 가난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캘커타의 빈민촌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1948년 『부유한 이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가난한 사람,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며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50년 단돈 45루피로 시작된 「사랑의 선교회」는 이제 「사랑의 선교 수사회」(1963)와 「협력자회」(1969), 「사랑의 선교 관상 수녀회」(1976), 「사랑의 선교 관상 수사회」(1979), 「사랑의 선교 사제회」(1984) 등으로 식구가 늘어나 전세계에서 오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 인도 캘커타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마더 데레사.
하느님의 작은 몽당 연필
82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데레사 수녀는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랑만이 최고의 선(善)이며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은 가난도, 고통도, 불행도, 절망 조차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꿔주는 유일한 대답이다.
가난의 선택도 바로 그 사랑의 당연한 귀결이다. 데레사 수녀는 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본다』며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분을 돌봐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고 말했다. 캘커타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그저 「마더」, 「어머니」라고만 부른다. 그가 자신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주었고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더 데레사를 영성이나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지극히 단순하고 분명한, 그리고 가난한 삶 속에서 우리는 그의 거룩함을 느끼고 볼 수 있을 뿐이다.
지난 95년 출간된 마더 데레사 일일 묵상집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나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작은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그는 또 자신을 낡은 전깃줄에 비유해 『나는 가늘고 낡아빠진 전깃줄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전기이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198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고 있다.
사랑의 혁명
쾌락과 성공, 물질적 풍요와 이기심이 지고의 가치인 현대인들에게 온전한 자기 포기와 헌신의 삶을 살았던 마더 데레사는 왜 그렇게 매력적인가?
콜로디예추크 신부는 그 이유를 데레사 수녀가 『극단적으로 복음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데레사 수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가르친대로 사랑으로써 그 말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대포나 폭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사랑의 혁명」이라 부를 만하다.
마더 데레사의 말들...
▲ 현대의 가장 큰 적은 사랑의 빈곤입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비우는 가난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정신입니다(1982년 5월, 가톨릭신문과 인터뷰에서).
▲ 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은 것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 만일 불친절로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지나친 친절이 실수가 된다고 합시다. 나는 비록 실수가 될지언정 지나친 친절을 택하겠습니다.
▲ 어떤 상류층의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로 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혁명입니다. 사랑의 혁명입니다.
▲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면 희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나환자를 만지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2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꺼이 할 수 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생명은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이들의 비명이 하느님의 귀에까지 들렸다고 확신합니다.
▲ 『어린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돌보겠습니다. 캘커타에서는 이런 농담이 유행입니다』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자연피임을 강조하시는데도 그 주위에는 점점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 애착 때문에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한번 살펴보세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적게 가질수록 좋지요.
▲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데, 불행하게도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유행하지 않습니다.
▲ 거룩함은 선택된 소수만의 사치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 가난한 사람들은 경이롭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존엄성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줍니다. 우리가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줍니다.
▲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일을 중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되지요.
▲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못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가 많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