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항상 이렇게 묻고 싶어한다.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있는가?』
과학과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 생명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이 쌓여왔다. 그래서 이전에는 결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간주됐던 부분까지도 이제는 과학적인 검증을 현대인들은 요청하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성서와 교회가 가르치는 인간 죽음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표상들 역시 첨단의 과학이론들에 의해 검증되지 않을 때 현대인들은 이를 한갓 전설이나 신화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교회는 죽음과 종말의 의미와 실체를 설명해야 할 때 때로는 난감한 처지에 직면한 듯하기도 하다.
천국과 지옥은 어디에?
세상에 종말이 오면 나타나는 또 다른 세상으로서의 천국은 무엇일까.
고대 셈족은 우주를 3층으로 된 집으로 여겼다. 맨 위층은 천국, 가운데층은 인간이 살고, 지하에는 열등한 신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삶의 위치가 변하는 것이었다. 예수 시대 유다인들 중에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죽는다고 생각한 사두가이파와 부활을 믿은 바리사이들이 있었고 에세네파는 육체가 죽은 뒤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초대교회에서 천국은 현실과 다른 종말론적 실재였다. 이레네오는 천국이 풍요로운 물질 세계가 회복되는 왕국, 아우구스티노는 완전한 영의 세계로 보았다. 중세에는 새 예루살렘과 같은 영원한 도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 그리스도와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곳이라는 상념이 중심이 됐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세계사의 의미로서 하느님 나라가 추구됐다. 현대에는 19세기말까지 인간의 노력을 통한 이상 사회의 성취라는 사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이는 20세기 들면서 후퇴하고 신학에서는 종말론적인 천국에 대한 견해가 후퇴했다.
현대에서는 천국의 개념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고 있으며 하느님 개념이 다양한 만큼 천국 역시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되지는 않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물음에 대해 항상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과 같다』고 비유로 말한다. 그래서 종종 천국,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나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잔치로 비유되곤 한다.
천국은 법이나 제도를 갖추고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세워지는 물리적인 왕국이 아니며 착한 영혼들을 위한 특정 장소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옥 역시 죄인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형벌의 장소가 아니다. 이미 3, 4세기 교부시대 이후 영원한 지옥불은 하느님의 사랑에 모순된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은 무엇일까? 천국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것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유보」이다. 하지만 천국은 시공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이자 무한한 사랑의 영역으로서 사랑과 친교가 완성된 상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됐고 한 사람이 사랑을 위해 작은 선택을 할 때 이미 거기서 천국은 시작된다. 하지만 이 시작은 완성에 이르지 않았고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충만한 사랑에 도달할 때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 오늘날 천국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될 것이다.
▲ 천국은 시공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이자 무한한 사랑의 영역으로서 사랑과 친교가 완성된 상태이다.
연옥, 통공과 대사
연옥에 대한 교리는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신앙이다. 연옥에 대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후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데에 장애되는 온갖 흠들을 제거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일러 연령이라고 부른다.
은총 안에서 죽었지만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지기 위해서 죽은 후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이 과정은 단죄 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구별된다. 연옥은 죄스런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순간, 즉 인간이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연옥이라는 말은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또 교회 안에서 꾸준하게 이어져온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깊이 연결된다.
연옥의 영혼들은 지상의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 등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 이런 기도는 통공(通功) 신앙의 표현이다. 기도와 함께 죽은 이를 지향으로 행해지는 희생이나 선행 등을 통해, 「대사」의 의미가 가능해진다. 가톨릭 교회가 매년 기념하고 있는 「위령성월」 역시 이러한 교리적 가르침과 전통에 바탕을 둔다.
「전대사」는 교회 안에서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남용되기도 했는데, 교회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선행, 미사 봉헌 등을 통해 연옥 영혼들의 잠벌이 사해져 그 영혼들이 연옥을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통공 행위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