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신부는 순수하게 한국적인 수도원을 창설하려는 뜻으로 1946년 4월 21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립했으며 이후 남자 수도회 설립 작업을 본격화, 방신부 자신도 재속 사제에서 수사 사제로 신분을 바꾸고 정식 수도자가 되고자 했다.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남자 수도회 창립은 당시 한국교회가 전교 지역 교회라는 처지에 놓여 있었음에도 한국 교회 고유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김대건과 동료 순교자들을 수호자로 모시고 「한국적 토양 안에서의 수도회 정착」을 천명한 것은 한국교회 토착화의 중요한 밑거름 역할이 됐다.
복자수도회가 전개한 최초 활동은 새남터 순교 성지 관리였다. 수도회는 1957년 순교지 관리를 통해 순교자 현양 활동을 전개했고 이어 새남터 성지 주변의 빈민들을 위해 1958년 「복자공민학교」를 설립, 교육 활동을 벌였으며 천안의 「대건 남자중학교」를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초기 복자수도회 활동은 교육 사업과 농장 경영이 중심이었는데 특히 교육사업은 전후 한국사회 교회의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농장 경영은 수도자로서의 노동 필요성을 충족하는 동시에 수도회 물적 기반을 마련키 위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수도회는 광주교구 요청으로 1959년 제주 서귀포분원을 개설, 귤 농장과 피정의 집을 운영했고 1961년 5월에는 인천교구 만수동에 분원을 설립해서 농장을 운영했다.
성직 수도회로서 성직자 양성이 요구되었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수도 생활을 위한 재정과 신학생들의 학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창립 초기부터 재정 자립이 최대 과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도회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도직을 모색, 1986년부터는 수원교구 이천분원에 의료 사업을 위한 병원 설립을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의료 사업은 재단 설립 당시부터 정관에 반영됐던 3대 사업, 즉 교회 선교 사업, 교육 사업, 의료 사업 중 하나였다. 1990년 개방형 정신병원으로 개원한 성안드레아 정신병원은 그러한 배경에서 탄생될 수 있었다.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 요청으로 1957년부터 새남터 성지 관리를 맡았던 수도회는 계속해서 기념성당과 기념관 건립을 새남터 순교자 현양사업으로 추진했고 이것은 한국교회사적으로는 물론 「순교자 현양에 유익한 사업」(「성헌」 제4조)을 특수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수도회 입장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1983년 9월 12일 새남터 성지에 순교성인기념성당 기공식을 가졌던 수도회는 1987년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이 성전은 대성당, 소성당, 전시실, 수도원 등을 갖춘 한국 전통 양식 성당의 모습으로도 교회안에 큰 특징을 남기고 있다.
수도회는 이후 순교자 영성 보급과 창설자 영성 연구 작업에도 본격적인 행보를 드러내고 있는데 1998년 6월 15일 순교자영성연구소를 공식적으로 발족한 것에 이어 1998년 8월 28일 창설자 영성연구소를 공식 설립, 한국적 동양적 영성 연구의 기본 틀을 마련해 놓고 있다.
한편 창설자인 방유룡 신부는 1986년 1월 24일 향년 87세로 선종했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빨마수녀회를 설립한 방신부는 한국교회 안에 고귀한 정신적 유산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양낙규 총원장 신부 인터뷰
“반세기 역사 돌아보며 새각오 다져”
▲ 양낙규 신부
10월 30일 수도회 설립 50주년 행사를 치른 한국순교복자 성직수도회 총원장 양낙규 신부는 『그간 여러 안건을 다루면서 수도회 영성과 사도직 등 삶 전반에 관한 점검과 이해를 도모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를 통해 수도회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월 준비위원회만 48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위원회 산하 실행 출판위원회 등 각 위원회들의 회의를 합치면 매월 3∼4번씩 모여야 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갈등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순명하는 법을 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은총의 체험』이라고 말했다.
『준비 작업 초기 50년사 발행 계획 외에는 별다른 구상이 없었지만 거듭되는 회의와 토의를 무아장학회 결성, 창설자 친필유고집 발행등 의미있는 기획들이 모아질 수 있었던 것도 그같은 회원들의 성숙성이 녹아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양신부는 들려줬다.
양신부는 특별히 50주년사를 정리하면서 선배 회원들부터 시작, 막내 회원까지 모든 이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들을 정리 검토하는 작업이 수도회 역사를 새롭게 체험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6.25 전쟁직후 창립해서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역사를 함께 해오는 동안 수도회 유지에 급급하면서 사실 교회에 기여한 부분이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성장한 만큼 수도회도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과 기여를 해왔다고 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영적 사목적인 면에서 요청하는 부분에 더욱 적절히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 양신부는 새로운 50주년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앞으로는 『북방선교에 주안점을 두는 가운데 교회 내적으로는 회원들 모두가 창설자 정신을 철저히 살아서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도록 노력해 갈 것 』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