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교황 비오 11세가 1925년 교서 「첫째의 것(Quas Primas)」를 발표해 제정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당시 만연하던 무신론과 세속주의를 경계하고, 그리스도가 하느님나라의 참된 왕임을 기억함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신자들은 이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왕직에 함께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고 그리스도 왕정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되새기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게 된다.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이 축일을 지내며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마르 10, 43 참조)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목숨을 다해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길 자세를 다지도록 권고한다.
-그리스도 왕직의 의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세례를 통해 신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삼중 사명인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 가운데 그리스도 왕직의 참다운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왕직(목자직)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셨듯이 다스리는 권한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이끄는 것처럼 만인과 만물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오직 사랑으로만 이 권위가 발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몸소 보여주셨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통치는 주종관계의 바탕에서 이뤄지는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위격적인 관계에서 이뤄지는 섬김이요 봉사다.
따라서 그리스도 왕권의 특징은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에 있다.
이런 그리스도 왕직의 본질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딛고 선 세상 속에서 봉사하는 소명에 맞갖게 삶으로써 「왕다운 품위」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왕직에 참여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매인 존재로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죄악의 지배에서 해방돼 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만물을 완성시키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자각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며 서로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 세상 속에서의 왕직
모든 신자들이 지니는 왕직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주권을 확립하는 데에 이른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신자들이 교회 내에서 지니는 의무와 권한뿐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으로서 세상의 죄악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사회의 제도와 인간의 삶이 죄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적극적인 사명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행하는 일과 만들어내는 문화에 그리스도의 가치를 불어넣음으로써 세상의 제도와 환경이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되도록 이끌어가야 하는 막중한 십자가를 지게 된다.
이로 인해 평신도들은 교회 안팎에서 특별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니…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6~38항).
이처럼 사회 개발과 사회복음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써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왕직인 것이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악에 맞선 투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왕된 권리와 의무를 깨우쳐 줌과 아울러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에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받을 심판을 생각하며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반성하도록 초대한다.
교회 안에조차 세속주의가 침투해 들어와 그리스도 왕권의 의미가 희석되고 있는 이 때,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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