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국땅에서, 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며 이땅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일하는 벽안(碧眼)의 사제 수도자들. 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더욱 따뜻하다. 구세주로 오실 예수가 몸소 실천하신 희생과 봉사, 나눔의 삶. 그것은 곧 비움, 내어줌, 무소유의 삶이다. 대림시기와 한해를 마무리 하는 연말을 맞아 우리 사회 그늘진 곳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제2의 그리스도」 그들의 삶을 소개한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한겨울이 바짝 다가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지난 11월 21일.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에 자리한 안나의 집을 찾았다. 수원교구 성남동성당 뒷편에 낡은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진 이곳에서는 오갈 곳 없는 노숙자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마당 한 켠에 배추가 수북히 쌓여있고, 무료급식 서너 시간 전임에도 일찌감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노숙자들이 보인다. 멀리 간편한 캐주얼 복장에 앞치마를 두른 외국인남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김하종(본명 : 빈첸시오 보르도.오블라띠 수도회.이탈리아인) 신부다.
『선생님들, 아저씨들. 간식 드세요. 이거 드시면서 몸 좀 녹이세요. 간식 더 필요하신 부∼운』
어색한 억양이지만 살갑다.
『오늘은 마침 간식거리가 있어서 좋아요. 떡볶이가 좀 남았다고 하네요』
김신부는 점심 먹기 바쁘게 안나의 집 주변 학교를 세 곳이나 돌았다. 급식 후 남은 음식을 모아오기 위해서다. 학교에서 가져온 밥과 밑반찬, 그리고 봉사자들이 안나의 집에서 직접 만드는 반찬은 오늘 저녁 노숙자들의 따뜻한 한끼 식사다.
『행복하잖아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요. 그러니 웃을 수 밖에요』 시종일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김하종 신부의 말이다.
김하종. 「하느님의 종」이라는 뜻이다. 김씨 성은 김대건 신부를 따랐다. 김신부는 이탈리아 그레고리안 대학을 다니는 평범한 교구 신학생이었다. 다만 어릴 적부터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간디, 타고르와 유교.불교에 심취했고 한국의 순교사(史)도 김신부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은 교구 신학생으로 양로원과 고아원 봉사활동을 나가며 바뀌게 된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에는 너무도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실직자와 알코올중독자,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들… 각박한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난뱅이들이었다.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이제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자」
김신부는 주저없이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는 것」을 수도회 카리스마로 지닌 오블라띠 수도회에 입회했다. 동양철학에 대해 관심이 많던 김신부는 한국에서 활동하라는 수도회의 명을 흔쾌히 수락했다.
1990년 한국 땅을 밟은 김신부는 봉사를 하려면 우선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강대 어학당을 다녔다. 주중에는 한국어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성남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수녀 두 명을 무작정 쫓아다니며 노인들과 장애인 가정을 가가호호 방문했다. 93년에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 평화의 집을 수원교구 성남 신흥동본당에 마련했다.
아울러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이 밀집해 거주하는 목련마을이 분당신도시에 들어서자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열었다. 낮에는 독거노인과 장애인을 찾아 음식을 나누고 때로은 어깨를 주물러드렸고, 밤에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안나의 집은 IMF 구제금융으로 실직자와 노숙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98년 문을 열었다. 오승철(마태오)씨는 고인이 된 어머니의 세례명을 따 어려운 이웃과 노숙자를 위한 식당을 마련했고, 그는 성남 일대에 봉사활동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김신부에게 이곳을 운영해 줄 것을 청했다.
『제가 처음부터 시작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저 다른 사람이 씨를 뿌리면 저는 그 씨앗을 열매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만 한거에요』
김신부는 평화의 집과 공부방, 그리고 안나의 집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많은 숨겨진 은인들이 「신부님이 원하신다면」이라고 물었을 때 따랐을 뿐이라는 것.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마치 모든 일을 자신이 한 것처럼 이름을 내미는 것이 그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한다.
안나의 집은 단순히 노숙자들에게 하루 한끼 식사를 대접하는 곳이 아니다. 의류지원과 건강진료, 이미용 서비스 등 물질적.육체적으로 황폐해져 있는 이들이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심리.신앙상담, 실업상담, 법률상담 등을 통해 영적인 건강도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물론 김신부 혼자서 도맡아하기는 버거운 일. 안나의 집이 생길 당시 4명이던 봉사자는 400여명으로 불어났다. 종합병원 전문의가 진료를 하고 대학교수가 상담을 펼친다. 벤처기업 등 단체와 개인들도 한 달에 한번 혹은 한 주에 한번 안나의 집을 찾아 무료급식을 돕는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죠. 자원봉사자들은 기적을 만드시는 분들이에요. 이런 분들이 더 많아져야 실직자, 노숙자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아직까지 노숙자들을 그저 능력이 없어 밥을 굶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 걱정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IMF 구제금융 이후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노숙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이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 등 시설에서 생활한 이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로 내쫓긴다. 나 하나 살기도 바쁜 세상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은 결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하고 만다고 김신부는 설명한다.
더 큰 문제는 노숙의 대물림. 노숙을 물려받은 자식들 또한 청소년 노숙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김신부는 현재 거리의 노숙자 중 10%가 청소년이라며 이들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마침 이날 성남동성당의 배려로 청소년 노숙자 다섯 명 정도가 숙식할 수 있는 청소년 쉘터(Shelter) 축복식이 열렸다. 청소년 노숙자들과 그들의 상담교사들이 함께 한 자리. 김신부는 『오늘 축복식은 단지 이 공간의 축복이 아니라 여기에 머물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가득 받을 대상은 차갑디 차가운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당한 채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외국신부가 왜 노숙자들을 돌보냐는 핀잔 섞인 우려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노숙자에 대한 편견에서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보는 것은 노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음식을 좀 나눠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찾은 빵공장과 학교에서도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선입견 섞인 눈빛을 많이도 봐왔다고 김신부는 전한다.
『왜 저를 외국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사람, 이탈리아 사람 모두가 하느님 나라 사람들이잖아요. 하느님이 한 세상을 만들었고 우리는 세상에서 은총을 받으며 살고 있잖아요. 저는 그저 은총에 목마른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뿐이에요』
하느님 나라 사람 김신부지만 사는 곳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한국생활 13년, 학교 식당의 주방시설이 부럽다며 한창 유행하던 『죽음이지』를 연발하는가 하면, 『대한민국 1%가 뭔지 아느냐. 바로 이 소형승합차를 말한다』며 농을 건넨다.
이후 계획을 묻자 김신부가 지갑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장기기증 및 시신기증 등록증이다. 빛바랜 헌혈증도 몇 장 보인다. 자신의 힘 닿는 데까지 일을 한 뒤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에도 이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지다.
『봉사자 여러분, 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은 여러분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절대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배식을 할 때도 두 손으로 하세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어요. 우리도 자신을 낮춰 정성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무료급식이 시작되기 전, 봉사자들을 한데 모은 김신부의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안나의 집 식당을 가득 메운다.
※성남 안나의 집=(031)757-6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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