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위기가 사회적으로 고조되던 당시 내적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각 가정에 교황님이 강복을 내리는 교황 강복장 수여의 혼인 갱신식을 거행했다. 이런 행사는 한국교회와 KBS, 주요 일간신문 등에도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일반 사회 가정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소년 소녀 가장의 날 행사이다. 1986년경으로 기억하는데 동사무소의 협조를 얻어 5월에 소년 소녀 가장의 날 행사를 했다. 지금은 많은 곳에서 이런 행사를 하지만 당시에는 거의 없는 행사였으니 불광동성당이 그 효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1988년 2월 25일은 명동성당 주임으로 부임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었다. 젊은이들의 노도와 같은 시위와 함성이 명동성당 일대를 진동하고 시위 군중이 성당 경내에 인산인해를 이루게 될 것이 예감됐다.
나는 이제 명동성당의 주임신부로서 기본 방침을 정해 사목에 임해야 했다. 그 기본 정신은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니 선인도 보통 사람도 또한 이른바 악인, 죄인도 다 같이 들어와 기도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동성당은 이제 데모 장소로서가 아니라 평화의 전당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생각에 힘이 되어 준 것은 성당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시위로 날이 밝고 날이 지는 중심지가 된 것에 대해 교구 신부님들, 보좌 신부님들, 사목위원들, 신자들 대다수가 성당이 이런 곳만은 아닌데 하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교회의 구원관과 사회정의관을 기저에 깔고 강력한 논조로 강론과 단체들을 지도해 시위를 거의 완전히 잠재웠다. 물론 젊은이들의 반항도 거셌다. 하지만 나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사실, 즉 사람들의 마음이 지쳤고 이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서 명동성당을 평화의 전당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고 강력한 논조로 강론과 대화를 통해 항변하는 젊은이들을 잠재웠다.
▲ 명동성당과 원내는 필자.
나는 강론을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생명, 그것도 한창 피어오르며 앞날이 창창한 생명이 이렇게 무참히 짓밟혀서는 안되며,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젊은이들의 투신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폭력적 시위를 잠재우는데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젊은이들의 힘을 올바르게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성당에 디스코텍을 설치하기도 했다.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참된 가치로 이끄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불의와 불합리한 사회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와 전망은 필봉과 강론으로 나타났다. 나는 해야 할 말들은 직설적으로, 정식으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 불광동본당에 있을 때 사회 정의 실현과 사회 정화에 애써야 했던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조선일보의 「아침 논단」의 경우, 6개월씩 두 번을 투고했는데 예외적으로 세 번째 부탁을 해오기도 했다. 당시 적지 않은 글들이 일간 신문에 실리곤 했다. 나름대로 나의 글들이 사회적인 호응과 공감을 얻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비판을 위한 비판, 시류를 탄 글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복음적 정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인 것이다.
시대의 변화는 생명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을 요청했다. 1992년 서강대학교 부설 생명문화연구소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이 됐다. 90년대초 아이들을 유괴하는 일이 빈발했는데, 생명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다각적인 생명문화 활동은 이러한 반생명적인 병리현상들을 불식시켰다.
사회복음화의 사명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통에 참여하고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고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사회의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가정과 청소년들이다. 가정을 바로세우고 자녀들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와 교회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