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교황청과의 수교 40주년을 맞아 양국간 관계의 역사와 그 의미를 살펴본다.
교황청과 한국, 한국교회
교황청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는 1831년 조선교구 설정에서 정식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1962년의 교계제도의 설정에서 비로소 정식관계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대한민국과 바티칸 시국과의 정식 외교관계는 1963년 말 공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한데서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교황청에서 한국에 교황사절을 파견한데 불과했고 교황사절은 원래 국가를 대상으로 파견된 외교관이 아니라 그 지방의 교회에 파견된 사절이기 때문이다.
교황사절이 한국에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1919년의 일이다. 당시 교황청은 일본 주재 교황사절관을 설치하고 일본 교황사절로 하여금 한국교회의 교황사절을 겸하도록 했다. 1947년 7월 처음으로 한국교회에 고유한 교황사절을 파견하게 되는데, 이때 메리놀 수도회 패트릭 번(Byrne) 몬시뇰이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됐다.
한국전쟁으로 번 주교가 납치됨에 따라 일본 교황사절이 한국교황사절을 겸했고 1953년부터는 당시 춘천 지목구의 토마스 퀸란 몬시뇰이 교황사절을 겸했다. 이후 1962년까지 6대 교황사절이 임명됐다.
1963년 대한민국과 교황청이 공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함에 따라 교황 바오로 6세가 12월 11일 대한민국에 교황공사관을 설치함을 공포했고 이에 따라 당시 교황사절인 델 주디체 대주교가 초대 교황청 공사로 승격됐고 대한민국 정부는 스위스 주재 이한빈 대사로 하여금 초대 교황청 주재 공사를 겸임하게 하고 1964년 4월 20일 교항 바오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1966년에 양국은 공사급 외교 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고 바오로 6세 교황은 1966년 9월 5일자로 대한민국에 교황대사관을 설치함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당시 서울의 델 주디체 교황공사는 교황대사로 승격됐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정일영 스위스 주재 대사로 하여금 교황청 주재 대사를 겸임하게 했다.
이후 대한민국과 교황청은 상호 대사급 외교 사절을 파견하면서 외교적 관계를 공고히 해왔다. 참고로 교황청은 번주교 이후 지금까지 5명의 교황사절과 1명의 교황사절 서리, 그리고 8명의 교황대사를 파견했으며 현재 제8대 주한 교황대사는 1997년 4월 23일 몽골 주재 교황대사를 겸임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모란디니 대주교이다.
교황청, 한국 사회 발전과 평화 지지
한국과 교황청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역대 교황과 교황청은 격동기 한국 사회의 발전과 그에 따른 한국의 국제 무대 등장에 크게 기여해왔다.
먼저 역사적으로 볼 때 교황청은 한반도가 서양문물과 접하는 18세기부터, 또 1784년 신앙 선조들의 자발적인 천주교 신앙의 수용을 계기로 조선에 큰 관심을 기울인 서방세계로서 한반도의 개화를 촉진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에 처음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해준 국가가 바로 교황청이며 한국 정부가 1948년 유엔 총회에서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받는데 있어서도 기여했다.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후에 요한 23세 교황이 된 파리 주재 대사 롱칼리 대주교, 훗날 바오로 6세 교황이 된 몬티니 등을 통해서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받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군사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교황청은 교황대사를 통해 부단히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관심을 보여왔고 정부에 공식 의사를 전달해왔다. 당시 주교회의의 대사회 성명과 기도회, 특히 지학순 주교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직자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가톨릭청년회, 가톨릭노동사목, 가톨릭농민회 등에 가입한 평신도들의 활약과 희생에는 교황청의 제반 사회 문서와 사회 정의를 위한 교황의 교도권이 배경이 돼 있었다.
특별히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은 양국간의 우의를 크게 다졌던 것으로 평가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첫 방문에서 우리 민족이 「현대 세계의 분열의 상징」처럼 둘로 갈라져 있음을 탄식했으며 이에 고무돼 최근 10년간 한국은 북한을 상대로 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고자 꾸준한 「햇볕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도 북핵문제가 국제적 관심과 우려를 자아내는 현실 속에서, 교황청의 유력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지는 한반도 사태에 대해 이틀이 멀다하고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그 기본 입장은 핵무기가 『점진적으로, 평등하고 결연하게』 폐기돼야 한다는 것이며 한반도 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 수단에 의거해 해결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과 교황청 인사들의 발언 역시 항상 이러한 기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인터뷰 / 성염 교황청 주재 한국 대사
“불혹의 나이처럼 양국관계 돈독해져”
▲ 성염 교황청 주재 한국 대사
- 한국.교황청 수교 4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 인생 40이 불혹의 나이라면, 두 나라가 수교를 한 지 40년이라는 햇수는 그만큼 양국관계가 튼실해졌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교황도 지난 7월 4일, 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장을 제정받으시는 자리에서 『오늘의 만남에서 나는 대한민국과 성좌가 국교를 맺은 지 40주년이 됨을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 국민이 가톨릭 교회와 맺은 긴밀한 사슬은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운 현존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고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이 40년을 계기로 200년에 걸친 로마교회와 한국교회의 돈독한 관계를 상기시키신 바 있습니다.
- 교황청과의 외교관계가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요.
▲ 교황청의 국제적 위상은 그 어떤 강대국에 못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과 유럽연합의 우호적 친선, 북핵문제에 대한 유럽연합의 온건한 태도나 대북식량원조 등에는 교황청의 발언과 설득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황청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우리 정부는 대북햇볕정책, 남북의 화해와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 북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평화로운 해결, 이라크에 재건을 위한 병력파견 등에 있어서 정신적 성원을 입는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평화는 정의의 열매』라는 교황청 외교의 근본정신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 교황 성하의 북한에 대한 관심과 교황청 구호기구들의 북한 지원 현황 및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 교황청의 대북원조는 비록 소액(20~30만불)이지만 지난 수년간 홍콩 카리타스를 통해서 지급되고 있으며, 교황청 외무차관이 수차 북한을 방문하고 그러한 활동이 유럽 사회 특히 유럽연합의 대북원조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교황청 사회복지평의회(Cor Unum)를 통해서도 ㅌ액수 미상의 원조가 제공되었습니다.
저의 신임장 제정식에서 교황께서 한국국민에게 보내시는 메시지에서도 『지나간 시대의 고통(6.25 전쟁과 이념적 갈등을 가리키는 듯함)이 보다 나은 시대를 내다보는 자신감을 감소시켜서는 안될 것』이라며 보수층과 신자들에게 대북한 대화와 원조의 기본자세를 격려하십니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북한측의 묵묵부답에 다소 실망하는 듯하면서도, 한국사회가 북한은 물론 중국과 교황청의 국교정상화 및 종교 자유 확보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하는 발언을 자주 합니다. 현재의 희망은 북한에 성직자 한 명이 상주하거나 혹은 정기적으로 왕래하고, 장충성당의 소수 교회 공동체에게나마 종교행사의 자유가 부여되었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 대사님과 대사관의 주요 업무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통상과 영사업무가 없으므로 이 대사관은 미니 공관에 해당합니다. 대사를 포함한 3인 공관입니다. 저의 주요활동은 수시로 교황청 성직자들을 만나 우리 정부의 정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활동, 교황청립 대학들과 학술기관의 주요행사에 참석하여 관심을 표하고 한국교회의 상황 등도 전달하는 일, 교황청 주재 80여개 대사관들의 각종 국경일 행사와 국가원수 방문 등의 기회에 참석하여 축의를 표하고 양국간의 우의를 다지는 일, 아시아 대륙 외교관단장으로서 교황청에 대륙을 대표하는 자리에 임석하고 아시아 대륙 대사들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활동, 로마에 수학하는 사제와 수도자들께 관심을 보여드리는 일 등으로 엮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임한지 5개월밖에 안되어 서서히 일에 익숙해지는 처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