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교구 영덕본당(주임=신기룡 신부) 신애공소. 40년전 마을이 이뤄졌을 때부터 든든한 안식처로 함께 해온 신앙터전이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평화스러운 이 마을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 정착마을이다.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신애」(信愛)를 삶터의 이름으로 정하고,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모여 서로를 보듬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현재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에서 공소사목을 하고 있으며, 수녀원을 비롯해 모두 28가구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한가구를 빼곤 모두 공소신자들이라 교우촌이나 다름없다.
십수년째 매일 공소에서 봉헌되는 저녁기도 시간. 돼지와 닭을 치다가도 기도시간이면 어김없이 함께 모이는 이들의 모습은 신앙이 곧 삶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 대게 정착마을이 그렇듯 돼지 등 가축을 사육해 생계를 이어간다. 집에서 기르는 개와 토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공소회장 홍연화씨
토요일에는 레지오마리애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공소에서 레지오 마리애가 열린다.
「은총의 모후」 쁘레시디움(단장=고정희.율리에따)에는 8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찾아간 날, 마침 새로운 신입단원이 들어와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활동보고 시간. 『활동보고 드립니다. 묵주의 기도 30단, 성서읽기 3회, 일손돕기 2시간…』
8명이 단원이 돌아가면서 보고를 한다. 활동 가운데 일손돕기가 빠지지 않는다. 무엇을 도왔다는 것인지?
공소회장 홍연화(대건 안드레아.68)씨가 설명해준다.
『우리 마을은 모두 한가족입니다. 기쁜 일, 궂은 일 모두 함께 나누기에 걱정이 없어요. 지난주 한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마을 식구들이 모두 함께 장례를 치뤘죠』
요즘은 김장철이라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함께 장을 보고, 김장을 담는다. 말로만 가족, 식구가 아닌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진 것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공동체인 것이다.
▲ 미사 전, 공소 앞마당에 모여 성가연습을 하고 있는 도미니까 수녀와 신자들. 새로운 성가를 배우는 표정이 밝다.
양계 양돈으로 생활 꾸려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고향을 만든 곳. 직접 벽돌을 찍어 집을 짓고 공소도 세웠다.
마을이장 전중원(암브로시오.65)씨는 『처음에는 원두막을 짓고 살다가 벽돌을 찍는 법을 배워서 집을 짓고, 판자를 이어 다리도 만들었다』며 신자들의 손으로 마을을 이루던 때를 회상했다.
대게 정착마을이 그렇듯 이곳에서도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양계, 양돈 등 가축들을 기른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떠나 일손이 부족한데다 사료값 폭등, 축산가격 폭락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 커져 축산업을 포기하는 농가가 많아졌다.
『돼지막사에 들어가면 냄새가 옷에 배여 갈아입어야 해요.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냄새난다며 멀리하기도 했었죠』
사회의 차디찬 냉대가 가슴에 꽂히기도 했다. 한센병에 선입견을 갖고, 높은 담을 쌓아가는 이들에게서 상처를 받기도 했다.
힘들고 고달픈 삶이었지만, 공소신자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은 보여지지 않았다. 밝게 웃고 얘기하는 그들에게서 오히려 신앙공동체다운 사랑과 넉넉함이 묻어났다. 그안에는 같은 신앙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부족한 것은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으로 희망을 갖고 살아온 시간들이 녹아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이들의 삶과 신앙생활을 연결하고, 공동체로 묶는 공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저마다 사는 형편이 넉넉치 않아 공소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미안함도 더러 있다.
『먹고 사는게 어려워 수녀님들 챙겨드리지도 못하고…』
『아니에요.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셔요. 쌀이 떨어져 걱정을 하면 쌀이 들어오고, 마을식구들의 텃밭에서 난 유기농 채소들로 먹거리를 하잖아요』
공소는 책임자인 김비아 수녀를 비롯해 3명의 수녀가 복숭아 농사를 지으며 공소를 꾸려왔다. 몇 달 전 오래된 나무를 베고 새 묘목을 심었다. 올겨울에는 말린 가자미를 팔아서 공소운영 등에 필요한 생활비를 마련하려 한다.
수녀원 앞 심어진 작은 묘목들. 열매를 맺을려면 4년은 기다려야 한다. 나무등걸이 뻗어나가고 복숭아들이 주렁주렁 열릴 그날을 기다리며 정성을 다해 보살필 것이다.
▲ 토요일 봉헌되는 주일미사 후, 공소 식구들과 영덕본당 신기룡 주임신부가 함께 했다.
기다림의 시기를 맞으며
이같은 기다림의 시기, 대림 첫째주. 제대 앞 대림환에 초가 하나 켜졌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병들고, 가난하고, 이젠 나이도 들어 힘도 없는 신애공소 신자들. 이들의 모습 속에서 작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약하고 부족함을 함께 나누고, 봉헌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이 작은공동체에서 뿜어나오는 사랑의 힘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먼 곳에 나간 자녀들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기 예수님이 오시리란 희망을 갖고 이 대림시기를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미사후, 축일을 맞은 본당주임신부를 위해 공소신자들이 정성껏 연습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노래말처럼 모두가 사랑받는 존재로, 사랑하는 존재로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들려주는 듯 했다.
2003년 대림시기. 다가오는 성탄을 기다리는 이 시기는 이들에게 또다른 삶의 희망으로,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시기로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