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 좋은 일을 했구나』
『매일 저녁 자리에 들면 하루 동안 내가 한 일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낯선 땅에서 몸만 해도 고단한데 마음까지 다친 사람들이 많아요. 상담소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은 환한 얼굴로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 감기가 걸려서 퀭한 얼굴로 진료소를 찾는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나서, 「아 오늘도 내가 참 좋은 일 했구나」하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조그만 연립주택에 자리한 갈릴래아 외국인노동자 사목센터. 소장 유진 신부의 하루는 그렇다. 하루 하루 고되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하루 하루를 무사하게, 조금의 행복이라도 느끼고 살아가게 치다꺼리를 해온 것이 벌써 15년이 다 되어간다.
거창하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을 시비삼지도 않는다. 마음 속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푸대접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눈꼽 만치라도 앙심을 품고 원망도 할 성 싶은데 유진 신부는 그런 말에는 오히려 시큰둥해 보인다. 하지만 그저 『섭섭』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그건 아마도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일상의 고초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더 큰 때문인 듯 싶기도 하다. 그래서 「거시적」인 정책 토론보다는 노동자들이 무엇을 제일 힘들어하는지, 그 생활을 들여다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어려움을 풀어 주는게 더 급선무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 중의 하나가 아기방이다. 센터에서 차로 15분 남짓, 안산시 선부3동에 있는 아기방은 반지하 셋방이지만 새집이라서 깔끔하고 정성껏 단장을 해서 아기들이 편안하게 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유진 신부가 현관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자 하나같이 쌍커풀에 눈망울이 커다란 아이 셋이 한꺼번에 돌아본다. 원래는 아이가 다섯인데 두 아이는 오늘 부모가 쉬는 날이라서 오지 않았다고 한다. 유진 신부는 기자를 안내하는 일도 깜빡 잊은 듯 아이들을 하나 하나 일으켜 안으며 어르기에 여념이 없다.
이곳 갈릴래아 아기방은 지난 9월 외국인노동자 자녀들의 보육을 위해 문을 열었다. 대개 맞벌이를 하는 부모들의 여건상 아이들을 돌봐줄 곳이 없으면 한 사람이 일손을 놓거나 갓 태어난 핏덩이를 자기 나라로 보내야 한다.
『부모가 자기 아이와 떨어져서 지내는 건 고된 노동이나 차별보다도 더 큰 아픔입니다. 또 자녀가 있는 노동자들에겐 보육 문제가 제일 큰 어려움이지요』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방 세 개 짜리 23평의 반지하 전세방을 싼값에 얻은게 가장 큰 힘이 됐다. 거기에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 유아용품 등 살림살이를 장만해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빌어 그럭저럭 아기방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됐다. 현재 이곳에 오는 아기들은 다섯. 더 많은 아기들을 돌봐주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은 재정이 넉넉하지가 못한 것이 아쉽다.
필리핀 사람인 유진(Eugene Docoy. 43) 신부가 한국에 온 것이 89년 6월 23일이니까, 14년 하고도 6개월이다. 말씀의 선교수도회(신언회, SVD) 소속 수사신부로 1년반 남짓한 마닐라에서의 보좌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왔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나서면 낯설고 두려운 법인데, 하물며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에서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그나마 피부색이 비슷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한국이라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됐다. 40년, 50년을 이국땅에서 살아간 선교사들도 있으니 불과 15년이 그리 대수는 아닌 듯하지만 결코 짧거나 평화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2년 반 동안 연세 한국어학당에서 한국말을 배운 뒤 그는 91년 성수동에서 기거하면서 외국인노동자들을 모아 미사를 하기 시작했다. 혜화동의 필리핀 공동체는 그가 시작한 일이다. 92년에 다른 이에게 공동체를 맡긴 뒤 왕십리, 자양동을 거쳐 안산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그는 경기도 전체의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안산, 수원, 광주, 용인, 화성 등을 중심으로 96년까지 정신없이 지내다가 97년 안산시 원곡동의 연립주택에 갈릴래아 외국인노동자 사목센터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지하방에서 시작했다. 집주인의 호의로 2년 동안 무료로 집을 빌렸다. 600만원을 들여 수리를 했지만, 비만 오면 거꾸로 올라오는 하수가 문제였다. 온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났다.
97년 한국에 IMF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도산하는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당연히 영세한 기업에서 일을 하던 외국인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모여들었다. 조그만 지하셋방에는 열댓명씩 되는 장정들이 몰렸다.
그러던 중 99년, 여기저기서 도움을 얻고 영광굴비와 딸기를 판매하고 책을 만들어 팔아 전세값을 마련해 2층으로 옮겼다. 그리고 2001년에는 3층도 함께 사용하면서 모임방도 만들고 성가 연습이나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올해는 아기방도 열었다.
성당 식구들과 형제처럼
갈릴래아 외국인노동자 사목센터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산재, 의보를 포함한 각종 상담과 분쟁 조정, 생활과 영성 상담까지 유진 신부와 2명의 상근자, 자원봉사자들의 손이 부족할 정도로 분주하다. 외국인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공제회 운영과 관련한 업무는 특히 손이 많이 간다. 자원봉사를 해주는 14명의 의료진들은 매달 회비를 내면서 아픈 노동자들을 돕는다. 원곡성당에서는 연 1회 정기검진이 실시되기도 한다.
안산시 일대에는 필리핀 노동자만 약 4000여명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약 3만 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요즘에는 원곡본당(주임=최병조 신부)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해주고 본당 차원에서의 외국인노동자 사목에 힘을 기울여 지역 내의 외국인노동자 사목과 관련해 긴밀한 연대와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성당에 「안산 가톨릭 이주 여성노동자 상담소」가 문을 열기도 했다.
요즘은 원곡본당 대부분 신자들이 외국인노동자들과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본당에서는 자원봉사를 비롯해서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주고 있으며 각종 행사 때에도 성당 시설을 지원한다. 성탄절에는 함께 예술제를 마련하기도 한다.
성당 게시판에는 갈릴래아 외국인노동자 사목센터 소식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주일마다 치과 진료가 이뤄진다. 본당에는 필리핀에서 온 평신도 선교사가 노인 재가복지, 어린이 영어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연대와 협력을 기대하고 있으며 적절한 역할 분담도 생각하고 있다.
유진 신부는 지금까지 한국 생활에서 아픈 기억들도 많다. 산업 연수생으로 입국했다가 심한 간질로인해 오자마자 돌아간 친구도 있고, 암으로 엄청난 치료비만 날리고 1년 뒤 재발해 귀국을 해야 했던 친구도 있다. 심지어 알코올 중독으로 폐가 망가져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쓰러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체험들의 끝에 유진 신부는, 자신의 한국 생활을 담은 짤막한 책 제목 그대로, 「함께 빵을 나누는」(Breaking Bread Together) 것이 자신의 직분임을 깨달았다. 그는 2000년, 사목센터 전세값을 보태기 위해 쓴 이 책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선교사이며 사제로서의 내게 진정한 기쁨이었다. 이주 노동자들은 내 친구요 교사이며 가족이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 인해 내가 겪었던 좌절과 실패, 미약한 성공들은 가장 의미심장한 경험들이었다. 내게 이러한 경험의 기회를 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을 간직한 유진 신부의 꿈은 소박하다. 치솟는 전세값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내집」을 마련하고, 이제 막 시작한 아기방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그 혼자가 아니라 한국 땅에서 일하는 모든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만들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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