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몰아닥친 한파에 궂은 겨울비까지 내리던 지난 12월 5일 오후. 전남 장성군 진원면 선적리에 위치한 노인종합복지시설 「프란치스꼬의 집」(원장=김기덕 수사.작은 형제회) 2층 휴게실에는 노인 셋이 모여 하염없이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한 할머니가 그 옆의 더 나이든 할머니에게 말한다. 『쩌기 수녀님 오네』 『뭐? 워디, 워디』 노인 셋의 눈길이 동시에 모인다. 그곳에는 한 수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노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 나 왔어. 어서 밥 먹으러 가야지』 『오늘 워디 갔었길래 하루종일 보이질 않은거여』 반갑기 그지없으나 심통부터 내는 할머니. 수녀는 미안한 마음에 무작정 할머니를 껴안는다.
『미안해 할머니, 광주 시내에 좀 다녀왔어. 하루종일 찾았구나…』 『밥은 무신 밥, 밥 안먹어』
식사를 거르겠다고 투정하는 할머니를 달래 기어이 휠체어에 앉힌다. 휠체어 바퀴를 조심스레 밀며 이것저것을 할머니에게 묻는 수녀. 며칠 전부터 부어오른 얼굴은 어떤지, 관절염은 괜찮아졌는지, 속옷은 제 때 갈아입었는지, 걱정이 태산이다. 살가운 웃음을 가득 머금은 수녀의 얼굴 아래로 눈물 고인 할머니의 얼굴이 겹쳐진다.
같은 시간 시설 외곽에 위치한 쓰레기 수거장. 한 수녀가 버려진 쓰레기 봉투를 맨손으로 뒤지며 재활용과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하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뒤적거리기를 30여분. 수녀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이윽고 수녀의 양손에는 조각이 떨어져나간 접시, 구멍난 고무장갑 등 아직 쓸만한 물건들이 한아름 들려있었다. 시설의 한 관계자는 『매주 두 차례 이곳을 방문하는 쓰레기 수거 직원이 방문 횟수를 줄여야겠다고 농담을 건넬 정도』라고 귀띔했다.
이 수녀들은 모두 프란치스꼬의 집의 봉사자들이다. 일본 프란치스꼬 의료봉사수녀회 소속 데데오(우스자카 스에코.64), 로사(쓰쓰미 유리코.65), 가브리엘라(오오쿠마 도요코.74) 수녀가 그 주인공들. 이들은 나가사키 성 프란치스꼬 병원 등지에서 노인 전문 간호사로 활동하다 지난 98년 3월 프란치스꼬의 집이 문을 열면서 방한해 5년째 이곳의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성 프란치스꼬 의료봉사수녀회는 병으로 고생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설립된 수도회. 프란치스꼬의 집을 개원한 작은 형제회의 요청으로 96년 한국에 진출했다.
이곳에 머무르는 70여명 남짓 노인들의 의식주 생활 점검을 비롯해 가정방문을 통한 재가복지 봉사가 일본인 봉사자 수녀들의 역할. 병약한 노인들을 수발하는 것을 기본으로 그들의 가족, 친구가 되어준다.
수녀들은 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노인들의 목욕, 식사준비, 기저귀 갈기, 물리치료 등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되는 기도 시간이 이들의 유일한 쉬는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언제 울릴지 모르는 비상벨 때문에 잠잘 때조차도 긴장을 풀 수 없다. 새벽 3시에 비상벨이 울려 달려가 보면 떨어진 이불을 집어달라는 할머니, 죽는 꿈을 꾸고 무서워서 눌렀다는 할아버지도 있다. 그러나 수녀들은 한마디 불평도 없다. 병마와 생활고, 외로움의 3중고를 겪는 노인들이 자신들의 존재로 인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수녀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동기는 그 사연만큼이나 각별하다.
분원장인 데데오 수녀는 96년 관구장의 명으로 한국에 올 때 한·일간의 과거사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특히 일제시대를 경험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이기에 더욱 두려웠다. 그러나 서강대 한국어학당과 광주보건대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며 만난 한국인 친구들은 그에게 한국인의 따뜻한 정(精)을 가슴 깊이 확인시켜 주었다. 주로 요양실에서 노인들의 생활 복지를 돕는 수녀는 이제 더없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운전면허와 풍물 등 한국문화를 익히고 배우는데도 시간을 할애중인 그는 생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맞아 「한국의 흙」이 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양 볼의 보조개가 인상적인 로사 수녀는 일제 말기에 가족 모두가 경남 진해에 살았다. 해군 함장이었던 수녀의 아버지는 진해 앞 바다에서 전사해 한국에 대한 의미가 남다르다. 평생 봉사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로사 수녀는 젊은 시절 결혼을 생각했던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가정을 꾸리면 아무래도 봉사할 기회가 적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은 수도자의 길을, 그 남자는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로사 수녀는 매 식사 때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70명 노인들의 약을 챙겨준다. 명실공히 시설의 「건강 지킴이」다.
수녀원의 큰언니 가브리엘라 수녀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병원 간호부장 출신이다. 그는 5년전 이 집의 개원식에 구경왔다가 일손이 모자란다는 얘기를 듣고 그날로 한국에 머무르게 됐다. 유일하게 한국말을 못하는 그는 『말을 많이 하면 봉사활동을 게을리 할 것 같아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시설의 「환경미화원」으로 통하는 가브리엘라 수녀는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세계가 모두 환경 보존을 위해 노력해, 창조된 만물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이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하듯 수녀들 역시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의 봉사활동은 처음부터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 한국 행을 결심했을 때는 『일본에도 봉사할 일이 쌓여 있는데 꼭 한국에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만류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짧은 한국어 실력 때문에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특히 할아버지들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을 나타내 수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매년 삼일절과 광복절 날 텔레비젼에서 일제 강점기와 전쟁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면 노인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5년 동안 쉬지 않고 돌보는 수녀들의 정성에 노인들은 차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하루 종일 우울해 하며 식사도 거르는 노인들이 생겨날 정도로 정이 들었다. 일본 수도생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미묘한 한?일 관계를 이해하게 된 것도 소중한 경험이다.
수녀들은 『평생 외국이라고는 나가 본적이 없는 생활이었지만 늘그막에 하느님께서는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저희들을 지금 이곳에 있게 해 주셨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말이 서툴러 느끼는 어려움과 불편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언어의 부자유로 약함과 겸손을 배우며 살아간다.
소망과 바람을 묻는 질문에 수녀들은 『더 이상의 소망은 없으며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버려지고 아픈 노인들이 자신들의 보살핌으로 새 삶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저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봉사할 수 있는 남은 생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했다.
약간은 어눌하지만 막힘 없이 쏟아내는 이야기들로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려니 데데오 수녀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5년 동안 살아오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어디를 가든 한국인들은 식사하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려면 미리 약속을 해야 해요. 경제 가치를 우선으로 여기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아직도 순수함과 따뜻함이 넘치는 인간적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 부디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것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녀원을 나서며 현관 앞에 내 걸린 프란치스꼬 성인의 「평화의 기도」가 눈길을 끌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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