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가족살해, 로또 열풍, 이라크전쟁, 노동자들의 잇따른 분신, 청년실업….
2003년 한국교회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한국교회와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적 징표가 된 키워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올 한해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해로 기억될 만하다. 시대를 투영하는 사회적 키워드에 새겨진 우리 사회의 흐름과 그 흐름 속을 헤쳐온 교회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런 교회의 행보 가운데 세상을 향해 울림을 전해준 일은 무엇이었을까.
■ 사회복지
세상 속에서 부수적이고 부분적인 역할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본질적인 활동을 펼쳐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가장 손쉽고도 널리 펼칠 수 있는 활동이 바로 사회복지 활동이다.
올 한해 교회의 사회복지 분야는 크게 두드러진 것은 없으나 체계적이고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이 이어졌으며, 정부의 사회복지 흐름에 맞춰 활동 영역 또한 꾸준히 확대되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한국교회 해외원조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한국 까리따스)의 공식 해외원조가 10주년을 맞았다는 점이다.
해외원조 10주년은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세계교회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온 한국교회의 위상을 새롭게 해주는 의미를 지닌다. 지난 1993년부터 해외원조를 시작한 사회복지위원회는 지난해 말까지 아프리카 36개국을 비롯, 아시아 20개 나라, 남미 8개 나라 등 총 72개 나라와 지역을 대상으로 332개 사업에 102억4587만원을 지원해 사랑의 세계화를 이뤄내는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해마다 국제 까리따스를 통해 사회복지위에 접수되는 70여건의 긴급지원 요청에 비해 지원되는 사례는 10∼15건 정도에 불과해 한국교회의 원조가 외형에 걸맞는 내용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나누는 교회」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해야 할 소명을 부여받고 있다.
각 교구나 수도회가 운영하는 각종 복지관의 수도 꾸준히 늘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도 눈 여겨 볼 부분이다.
올 1월 21일 원주교구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제천시노인종합복지관이 문을 연 것을 필두로 4월 3일에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일산종합사회복지관이 개관식을 가졌다. 이어 4월 10일에는 삼척종합사회복지관이 개관하는가 하면, 6월에는 마산교구가 마산시로부터 마산장애인복지관을 수탁, 운영에 들어갔다. 또 최근에는 지난 11월 18일 수원교구 사회복지회가 경기도로부터 「경기도장애인종합복지관」을 수탁함으로써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관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활동을 통해 믿음과 노하우를 축적해온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성과라는 면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이들 복지관의 경우 지역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지역사회에 내재한 문제를 해소하고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호평을 얻고 있어 교회 사회복지의 나아갈 길을 가늠케 한다.
한 예로 동정성모회가 운영하는 일산종합복지관의 경우 노인주간보호센터, 발달장애아동 치료센터 등 지역주민의 복지 욕구에 따른 프로그램뿐 아니라 9월에는 국내 최초로 장애인의 주거지와 이용을 원하는 개별목적지를 연결하는 이동 프로그램인「장애우 이동도우미센터」의 문을 열어 서비스 내용과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서울 성동노인종합복지관이 국내 최초로 도입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치매도우미 파견사업」이나 기쁜우리복지관이 장애인들의 자활을 위해 연 장애인 빵공장 「5B2F」등은 복지모델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지역주민들과의 나눔의 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곳곳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한발 더 다가서려는 교회상을 심고 있다.
실천적 나눔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월 태풍 매미로 수재민이 발생하자 전국의 신자들은 다양한 나눔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의 실천에 앞장섰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는 수해 발생 직후 곧바로 재해대책 상황실을 가동, 마산과 부산교구에 각각 5000만원씩을 긴급 지원한데 이어 제주 대구 광주대교구 등에 4000만원씩, 원주 춘천 안동교구 등에 2000만원씩을 지원하는 등 8개 교구에 총 5억6230여만원을 모아 전하는 등 기동성을 발휘했다. 또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수원교구, 마산교구 등이 수재민을 위한 2차 헌금과 특별헌금을 실시해 성금을 피해지역 교구에 전달해 훈훈함을 더했고, 본당 차원의 지원 활동도 활발히 이뤄졌다.
올해는 또 교회가 사회의 흐름에 맞춰 복지영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온 해라 고 할 수 있다.
7월에는 교회가 앞장서 서울시종교계사회복지관협의회와 서울시사회복지관협회 산하 서울시내 91개 사회복지관과 함께 복지관 운영의 근본적 개선을 주장하며 처음으로 정부보조금 현실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또 서울시가 발족을 추진해온 「서울복지재단」설립에 대해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여론을 움직여 공청회를 이끌어내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정책 수립에 교회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해였다.
그러나 고령화사회에 진입하면서 점점 늘어가는 노인문제로 사회가 노인시설을 확충하고 예산을 확대하는 등 뒤늦은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교회는 이런 흐름에도 뒤따라가고 있는 실정이어서 좀더 적극적인 모습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문제 제기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끊이지 않았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마련한 사회복지 종사자들을 위한 각종 교육과 피정은 물론 교구 차원의 장에서도 이 문제는 거의 빠지지 않아 새해에는 이런 논의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인권·사회
올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외국인노동자 문제로 인권 의식의 지평을 국내외로 넓힌 한 해였다. 또 이중처벌의 문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빗장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사회보호법 폐지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소외된 이들의 인권문제에 눈을 돌리지 못했던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해이기도 했다.
인권 분야에서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평화」를 갈구하는 일관된 모습이었다.
정전협정 체결 50돌을 맞은 올해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위기구조를 고착화시켜온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한 대구 광주 부산 청주 등 정평위가 구성되어 있는 13개 전 교구는 정전일인 7월 27일 공동성명서를 내 『평화의 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하고 평화를 위하여 투신할 것』을 하나된 목소리로 천명했다. 이런 교회 차원의 공식 입장 표명에 이어 9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부산 청주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인권위원회, 광주교구 환경사제모임, 청주교구 가톨릭농민회 등 20개 단체들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천주교연대」를 결성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다각적인 활동에 나서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평화를 위한 교회의 목소리가 높았던 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이라크 파병 반대
특히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확산됐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교회 단체들은 2월 14일 서울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15일에는 각계 사회.시민단체들과 함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어떤 전쟁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교회 내 움직임은 미국의 한국군 추가파병 요청 이후 거세져 서울을 비롯한 10개 교구 정평위와 11개 교회 단체들은 9월 18일 「미국의 이라크 추가파병요청에 대한 천주교 공동성명」을 발표, 미국 정부의 전투병 파병요청에 대해 단호히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나아가 교회 단체들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반전평화기독인모임 등 개신교측의 단체들과 연대해 9월 27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9.27 이라크 전쟁 희생자 추모와 한국군 파병 반대를 위한 천주교.개신교 연합기도회」를 여는가 하면, 10월 14일에는 교회 내 30개 단체들로 「이라크 파병반대 천주교연대」를 결성하는 등 다각적인 파병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
외국인노동자 강제출국을 계기로 이주노동자의 인권 향상을 위한 구심점이 마련되고 외국인사목 연대 가능성이 확대된 것도 교회 인권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교회는 3월 14일 외국인사목자 대표자 모임을 통해 외국인사목에 대한 새로운 틀을 마련했다. 이 자리를 계기로 교회는 성공회 및 개신교 장로회 등에서 보여지고 있는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한 유기적이고 유연한 대처와 체계에 눈길을 돌리게 됐다. 또 외국인노동자 인권 개선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등 외국인노동자사목 관계자들은 10월 22일 권기홍 노동부장관을 만난 데 이어 27일에는 강금실 법무부장관을 만나는 등 적극적인 대정부 활동에 나서는가 하면 한국그리스도생활공동체 부설 이주노동자인권센터가 10월 26일「제1회 이주노동자와 용인시민이 함께 하는 아시아문화축제」를 개최해 이주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외국인노동자사목의 지평을 넓혀왔다.
사회보호법 폐지운동 새 전기 맞아
이중, 삼중 처벌로 인권 침해의 대명사로 인식되어온 사회보호법에 대한 교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돌아볼 일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교회 내 단체들은 사회보호법 폐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기 위해 법무부장관 면담을 비롯해 토론회와 대국민 캠페인을 마련하는 한편, 청송감호소 인권침해실태 조사에 나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사회보호법 폐지문제가 사회의 의제로 새롭게 등장하도록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KAL기, 송두율 문제 공론화
또 의혹에 묻혀온 KAL858기 사건과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교회 안팎의 인권 단체들은 이같은 올해의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에는 △대국민 인권교육 활성화 △인권단체간 연대 활동 강화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 △사회보호법 등 국가의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 등을 구체화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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