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초입에 들어서자 「강원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영어문구를 내건 화려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 하는데 행인이 없다. 주위에 들어 선 전당포에 들어가서야 성당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갈수록 카지노 이용객들을 태운 셔틀버스의 행렬이 더욱 잦아졌다.
# 풍경 둘
고한역을 지나 읍내 끝자락에 다 가서야 성당을 찾을 수 있었다. 성당은 아예 문을 닫은 듯한 병원과 전당포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기타연습을 하는 아이들도 보였다. 원주교구 고한본당 흑빛공부방의 동아리 활동이 한창이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졸업을 앞둔 고3 학생까지, 성당 제의방과 강당, 교리실을 오가며 내뿜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인적 드문 읍내와는 사뭇 다르다.
흑빛공부방은 이 지역 학생들을 위한 대표적이자 유일한 교육.문화공간이다. 매일 저녁이 되면 학생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곳을 찾는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상근교사 두 명과 자원봉사자들이 국.영.수 과목을 가르치고, 저녁 10시부터는 고3 학생들이 자율학습을 하도록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매주 목요일과 둘째 넷째 토요일에는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정기 영화상영」을, 매주 금요일에는 영화, 풍물, 기타교실 등 동아리 활동도 열린다.
지난해 12월과 올 1월에는 영화감독, 방송작가 등을 초청해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 「영화야 노올자」를 개최했고, 미디어 비평교육 「내가 만드는 미디어」도 올 6월에서 8월까지 열었다.
주일미사 참례자가 50여명에 불과한 작은 본당에서 열리는 행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고 참신하다.
현재 흑빛공부방을 찾는 학생들은 40여명 정도. 교회를 가건 성당에 다니건 문제되지 않는다. 또래의 친구를 만나 공부하고 자신의 눈 높이에 맞는 다양한 문화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학생들이 공부방을 찾는 이유다.
사실 고한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아이들은 잊혀져 있었다. 공부방을 찾는 학생들이 모습이 활기차고 밝은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폐광촌되며 아픔 시작
지난 89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폐광이 늘어나면서 고한의 아픔은 시작됐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졸지에 실업자가 됐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바로 어제까지 함께 점심을 먹었던 친구들이 이사를 갔다. 부모가 모두 집을 나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2000년 「폐광지역 진흥지구」라는 이름으로 내국인 출입 카지노가 들어섰지만 카지노 유치로 가졌던 지역발전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박중독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전당포와 모텔만이 읍내를 가득 채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고등학교가 두 개씩 있는 곳이었지만 학생들을 위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PC방과 편의점이 그나마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 학원이 한 곳 들어섰지만 이곳 학생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원을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학원은 얼마 있지 않아 문을 닫았다.
공부방은 지난 93년 삼척탄좌 독서실 1층에 처음 문을 열었다. 결손가정 아이들과 문화시설도 없는 환경에서 자칫 탈선의 길로 빠질 수 있는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된 것. 95년 성당으로 쓰이던 건물로 이전해 운영되던 공부방은 지역 내에서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 집으로 유명할 만큼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도로 건설을 이유로 주변의 집들과 함께 철거됐다.
공부방 건물 철거 후 중단됐던 공부방이 다시 시작된 것은 자신들의 유일한 보금자리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던 학생들에 의해서였다. 본당주임 이우갑 신부는 공부방을 다시 만들자는 학생들의 청을 받아들여 흔쾌히 성당 사제관 집무실과 숙소를 내어줬다.
본당 어른들의 반대도 있었다. 학생들이 남녀 구분 없이 밤 늦게 성당을 드나드는 것도 보기 안 좋고 놀러오는 아이들을 성당에서 그냥 방치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부방마저 없다면 이 지역 학생들은 말 그대로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되고 말 것은 뻔한 일이었다.
▲ 매월 첫째 토요일 학생 전체가 모이는 총회행사를 갖는다. 12월 총회날, 곧 공부방을 떠나야할 고3 학생들이 아쉬움을 접고 후배들과 함께 했다.
학생들이 직접 그린 공부방 설계도. 언젠가는 공부방을 다시 마련하게 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학생들이 직접 그린 공부방 설계도. 언젠가는 공부방을 다시 마련하게 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 성당제의실에서 연습하는 풍물동아리.
▲ 수능마친 학생들이 기타배우기 여념없다.
흑사랑 모임 선후배 이어
두 명의 상근 교사가 공부방에 상주하면서 차차 공부방이 자리를 잡았다. 차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태백에서 풍물과 기타를 가르치는 자원봉사자가 동아리 활동을 돕고 있고, 서울 등 대도시에서도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학생들에게 강의해 주는 이들도 생겨났다. 본당 신자들도 성당에 학생들이 북적거려 사람 사는 곳 같다며 흡족해 하는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흑빛공부방을 아끼고 지원해주는 이들은 이곳에서 공부하다 외지로 떠난 공부방 선배들, 그리고 공부방의 역사와 함께 했던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들은 「흑사랑」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후배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해 12월에는 학생 귀가차량이 낡아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흔쾌히 15인승 중고 봉고차를 구입해 기증하기도 했다. 봉고차는 세 명의 차량 운행봉사자들이 돌아가며 공부방 학생들을 학교에서 데려오고 밤 늦은 시간에는 귀가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
흑사랑 회원들은 또 후원모임을 정기적으로 열어 공부방 운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찾고 있다. 올해 초에는 처음으로 흑빛공부방 선후배 친선체육대회를 열기도 했다. 선배들은 방학 중 고향을 찾아 후배들에게 보충학습을 시키기도 한다.
이우갑 신부는 『선배나 자원봉사자들이 공부방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는 것은 타지역과는 다른 어려운 상황에서 성장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의 후배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학원 하나 서점 하나 없는 곳에서 공부방은 선배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선배들은 이제 그 희망의 끈을 후배들도 다잡을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 학생들이 직접 그린 공부방 설계또. 언젠가는 공부방을 다시 마련하게 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걱정거리도 나누는 곳
동아리활동이 끝나자 학생들이 거실로 모여든다. 아이들에게는 왕엄마로 통하는 박은영(다비타.34)씨가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학교생활은 어떤지, 고등학교 진학은 어떻게 할 건지 세심하게 묻는다. 공부방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 지 알아보고 그들의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는 것이 공부방의 참 역할이라는 생각에서다.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요. 때묻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나이보다도 훨씬 성숙한 모습들은 외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편견과는 많이 다르죠』
탄광이 문을 닫고 카지노가 들어설 때, 아무도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폐광촌, 카지노, 도박중독자, 전당포…. 고한을 짓누르는 수많은 단어들은 아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공부방에서만큼은 다르다. 지난 10년간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공부방을 스쳐갔지만 그때도 지금도 공부방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그 꿈이 때로는 벅차고 힘겨워도 공부방은 그들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탄 가루가 쌓인 검은 언덕과 슬레이트 지붕, 「흑룡강」이라 불리는 검붉은 하천으로 우울한 검은 동네 고한에 밝은 빛이 되어줄, 이름 그대로 「흑빛」 공부방으로 자리하고 있다.
『○○야. 성탄전야미사 때 국악미사 봉헌하는 거 연습해야 해, 그리고 미사 끝나고 국수잔치 하는 데 누나들 준비하는 거 도와줄꺼지』
『그럼요 선생님. 도와주려고 맘 먹고 있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섭섭하죠』
비가 부슬부슬 내려 더욱 삭막하기만 한 바깥과는 달리 밤 늦도록 끊이지 않는 공부방에서의 대화가 푸근함마저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