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
올 한해 험난한 생명의 바다를 헤쳐온 한국교회를 읽게 하는 키워드는 「생명31운동」이다.
임신한 날부터 28주 이내에 제한적으로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한 모자보건법 제정(1973년 2월 8일) 30주년을 맞아 이 땅의 반생명문화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생명문화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생명31운동」은 잠들어 있는 우리의 내면을 흔들어 깨워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바람과 운동으로 표출됐다.
올 1월 17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의 「생명31운동」 계획안 승인에 이어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를 책임주교로 한 「생명31운동본부」 결성 이후 이어진 교회의 다양한 활동은 생명의 수호자로서 교회의 위상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2월 5일 국회 도서관에서 「생명문화와 낙태 - 모자보건법 14조항에 관한 다각적 검토」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와 모자보건법 제정 30주년 전야인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신자 등 7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생명31운동」선포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막이 오른 「생명31운동」은 이어 전국의 낙태시술 거부 의사들을 초청해 마련된 「생명을 사랑하는 의료인 초청만찬(3월 15일)」, 「생명31 열린음악회(5월 16일)」와 워크숍(7월 1일), 「생명수호 거리 문화캠페인(11월 8일)」 등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새롭게 하며 사그라져 가는 생명의 불씨를 지폈다.
이같은 활동에 힘입어 군종교구가 처음으로 「생명가정수호 모범상」(11월 16일)을 제정하는 등 교구와 단체별로 그 어느 때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다양한 장을 마련해 「생명운동」을 사회.문화운동으로 승화시키는 주춧돌을 놓았다. 이에 따라 ▲2003년 : 개인인식의 단계 ▲2004년 : 사회인식의 해 ▲2005년 : 문화정착의 해 ▲2006년 : 국제 정착의 해 ▲2007년 : 국제적 환경구축의 해 등 5개년 계획으로 운동방향이 설정된 생명31운동의 행보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생명운동의 다른 한 축으로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교회 안팎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 또한 올해 한국교회가 거둔 성과 가운데 하나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중심이 돼 이뤄져온 사형폐지운동은 지난해에 비해 소강상태를 보이긴 했지만 범종교 차원의 연합기도회, 국회의원 및 법무부장관 면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몇 년전부터 활성화되고 있는 국제간 연대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1년부터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사형폐지 특별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조차 상정되지 못한 가운데 자동폐기될 상황에 놓인 현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두터운 벽을 실감케 하며 새로운 모색과 자세를 촉구하고 있다.
올해는 또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산 문제가 교회가 새롭게 눈을 돌려야 할 영역으로 부각된 해였다. 아울러 교회의 생명운동이 일반신자들에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는 지적도 해결해나가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자들부터 일상에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 방향과 실천계획을 마련해 생명운동의 현장성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 환경
환경과 관련해 올해 교회 안팎을 뜨겁게 달구었던 문제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부안 핵폐기장 문제였다.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정부의 입장과 이를 백지화해야 한다는 민간의 반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보여준 신자들의 모습은 광역화되고 있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교회가 취해야 할 자세와 몫을 새롭게 해주었다.
「공동선」이라는 깃발을 든 신자들의 활동은 다양한 종단과 환경단체 등이 함께 하는 가운데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보일배」라는 종교적 성찰을 바탕으로 고행을 무릅쓴 운동이었다.
「생명.평화.환경을 위한 범종교인 기도회(1월 22일)」를 시작으로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대화마당(2월 7일)」 등으로 다져진 종교인들의 마음은 3월 28일에 시작돼 두 달여 동안 이어진 문규현 신부 등 4대 종단 성직자들의 삼보일배 기도수행으로 모아졌다. 전북 부안 해창갯벌에서 출발해 300여km 구간을 정진한 성직자들의 고행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새만금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킨 계기가 됐다. 이같은 종교인들의 고난을 무릅쓴 활동은 한국교회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새만금 갯벌과 온 세상에 생명과 평화가 넘치길 기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으로 공식 입장을 표명토록 하는 등 적잖은 반향을 낳았다.
삼보일배를 이어 받아 4대 종단 여성 수도자들이 6월 20일부터 12일간 서울에서 새만금까지 도보순례를 했으며, 이어 천주교 환경단체들이 7월 9일부터 각 교구별로 돌아가며 부안 해창갯벌에서 석달 동안 매주 수요미사를 봉헌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행보를 보였다.
올 7월은 또 핵폐기장 부지문제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7월 24일 정부가 위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자 천주교 환경연대 등 교회 내 단체들은 곧장 핵폐기물의 위험성과 핵발전소 문제에 대한 홍보 리플릿을 발간하고,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정부의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정책을 재생가능 에너지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8월 11일에는 전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전북지역 4대 종단이 공동으로 핵없는 세상을 위한 「생명 평화 종교인 문화제」를 여는가 하면 11월 24일에는 부안성당에서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하는 등 신자들과 시민들의 공감대를 얻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전주교구 사제단이 11월 24일부터 단식기도에 들어가는가 하면 12월 8일에는 전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부안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국미사를 봉헌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신앙인의 입장에서 지역사회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같은 교회 안팎의 의지와 힘이 모인 결과 지난 12월 10일 핵폐기장 건설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올해는 교구 차원의 환경기구 출범, 다양한 환경프로그램 마련 등으로 환경사목의 지평이 확대되기도 한 해였다.
인천교구와 안동교구가 각각 설립한 교구 환경사목위원회와 생명환경연대를 비롯해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가 청소년들이 친환경적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발족시킨 청소년 환경기자단(3월 22일)과 「청년 도보 생태 기행」(8월 8∼14일), 서울 일산본당의 「천주교 환경상」 제정 등은 과거에 비해 교구와 사목 일선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환경보전운동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자들의 환경의식이나 교육 프로그램 참여도가 낮은 현실은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로 부여받고 있다.
■ 민족화해 및 일치운동
올 한해 한국교회의 민족화해 및 일치운동은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다. 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발족과 대북 식량지원으로 본격화된 교회의 민족화해운동은 9년째를 맞으면서 「피로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대북 지원이 끊긴 것은 아니다. 올 한해만 해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를 비롯해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각 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을 통해 5억3000여만원(8월말 현재)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같은 내용은 98년 43억여원에 이르는 대북 지원을 정점으로 99년 22억여원, 2000년 26억여원, 2001년 27억여원을 지원했던 데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민족화해운동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북한 식량난이 90년대 말에 비해 나아졌고, 대북지원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진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교회의 민족화해 및 일치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자체적 통일역량 구축이 시급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1월 17∼18일 열린 제6차 민족화해 가톨릭네트워크 모임에서 지적됐듯이, 대북지원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북지원 창구 단일화를 통해 중복지원을 줄이고 정보를 공유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통일 일꾼을 길러내기 위한 체계적 민족화해 교육, 대북지원사업의 효율적 입안과 실천, 식량지원에서 기술지원으로의 전환, 잠재된 이데올로기 극복, 민족화해를 위한 장기적 대안 마련 등도 교회가 꾸준히 노력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6월 22일 경기도 파주 비무장지대 내 도라산역 광장에서 개최한 「민족화합의 대미사」와 서울 광주 부산 수원 마산 인천 전주 청주교구 등 8개 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대표로 구성된 대규모 방북단의 북한 방문(7월 29∼8월 2일) 등은 신앙인의 시대적 소명과 민족화해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제84주년 3.1절을 맞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한 것은 통일을 향한 의미있는 발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남북 신자들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그간 축적해온 믿음의 결실을 새롭게 꽃피울 수 있는 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이 새해 한국교회가 안게 될 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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