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논점들
다양한 논쟁을 야기하는 두 미사 전례의 차이점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미사 주례 사제가 누구를 (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오 5세 전례에서는 주례자가 회중과 더불어 제대를 향해 있다. 물론 이 제대 자체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바쳐진 십자가를 상징하지만 제대 위에도 따로 십자고상이 모셔져 있다. 이에 비해 바오로 6세 전례에서는 주례자가 제대를 사이에 두고 회중을 향해 있다. 제대가 의미하는 바와 제대 위에 십자고상이 모셔져 있다는 점은 비오 5세 전례에서와 같다. 다만 여기서는 십자고상이 주례자의 위치가 다른 만큼 제대 위의 반대쪽에 모셔진다. 따라서 미사 주례자가 제대를 향해 있든 회중을 향해 있든 이 두 미사 전례에서 꼭 같이 중심이 되는 것은 제대요 이 제대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이며, 그리하여 그 궁극적인 중심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일치하여 최상의 영광과 영예를 받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인 것이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신앙적 사실이다.
하지만 미사 전례의 핵심적인 수행자인 주례 사제의 공간적인 위치 및 그 움직임의 차이가 그 미사 전례 자체의 목적과 중심을 드러내게도 또는 퇴색되게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바로 인간이 갖는 육체적인 조건 때문이다.
그런데 새 미사 전례에서는 주례자가 제대를 사이에 두고 회중을 마주 보며 전례를 거행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제대나 그 위에 놓여진 십자가보다도 주례자에게 더 큰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 전례에서는 미사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중심이어야 할 하느님은 잘 드러나지 않고 대신 미사 주례자만 드러나게 되는 불균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동쪽이라는 방향과 관련된 문제이다. 옛 전례에서는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제대는 항상 동쪽에 모시도록 규정되어 있어서 주례자와 회중은 미사 동안 줄곧 함께 동쪽을 향해서 전례를 거행하도록 되어 있다. 이 동쪽을 향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러 재림하실 주님이 바로 동쪽으로부터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옛 미사 전례는 전례의 외적인 공간 구조 자체도 주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새 미사 전례에서는 이 동쪽이라는 방향에 대한 고려가 아예 없다. 동쪽이라는 방향이 무시됨으로써 동쪽에서부터 오실 주님에 대한 의식도 약화되어온 게 아닐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새 미사 전례는 미사의 목적이요 중심이신 하느님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숨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전례의 중심이 적어도 공간적으로는 주례자가 되어버리는 민망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연 중에 사제의 자의식에, 그리고 신자들의 전례 감각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회중과 함께 하느님을 향해 예배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경신 행위인 미사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드러나는 대신 오히려 그 봉사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 이상한 일이 요즘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좋은 강론을 하는 것은 미사 주례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좋은 강론은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의 신앙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미사 전례가 교회 안에 정착되면서 주례자의 강론이 미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커져 버린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사제단이 신자들을 등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비오 5세 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내친 김에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주례자가 회중을 향하게 되는 새 미사 전례의 공간적 구성 및 동쪽이라는 방향의 무시가 사제의 의식 안에 미사는 회중을 위한 봉사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봉사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좀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회중이 없는 경우 적지 않은 사제들이 혼자만의 미사 봉헌을 소홀히 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한국 교회는 구미 각국의 교회와는 달리 성당들이 대부분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공의회 이전의 제대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회중과 함께 하는 미사 전례를 전제로 설계된 지금의 제대 위에서 사제가 혼자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좀 어색한 일이기는 할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이 잘 드러나지 않는 미사 전례의 공간적 구성은 교회 생활의 더 크고 중요한 변화를 야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교회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 미사 전례와 더불어 점점 더 정치적 참여를 가속화해 왔다고 비판한다. 교회는 이제 제대 위에서도 하느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이 세상 이야기를 더욱 더 즐겨 한다는 것이다. 수직적 차원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교회 안에서조차 점점 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고 그 자리를 대신 수평적인 인간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와 연관된 복잡다단한 이야기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한 현실 참여라고는 하지만 그 궁극적인 관심이 하느님 나라보다는 현실에 훨씬 더 많이 놓여진다는 비판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종류의 새로운 신학들, 정치 신학, 세속 신학, 해방 신학, 여성 신학, 흑인 신학, 환경 신학 등도 어떤 의미로는 결국 일종의 사신 신학 즉 하느님 죽음의 신학 또는 하느님 부재의 신학의 다양한 분파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한다.
지나친 중상과 비방이라고 그냥 넘길 비판만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사제들은 어쩌면 점점 더 많이 세상 일에 매달리고 따라서 세상 일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과의 일에 대해 말하기는 점점 더 주저하게 되고 자신이 없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묻는 것이 교회 내에서조차 무례하거나 교양 없는 일로 치부되는 세태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옛 미사 전례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제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