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가장 먼저 여는 사람들.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준본당 사람들의 성탄맞이 모습을 스케치해보았다. 모두들 잠자고 있는 새벽, 하루를 열며 생선비린내 가득한 시장을 무대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마굿간 구유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다.
# 02:00 하루 시작
노량진 학원가의 불빛도 국철의 요란한 굉음도 사그라든 깊은 밤. 노량진수산시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만 여평 가까운 시장전체를 밝히는 백열등과 이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의 모습, 전국 각지에서 밤새 달려온 트럭들이 쏟아내는 수산물, 펄떡펄떡 뛰는 생선들 사이에서 현란한 손가락질과 거친 목소리로 경매를 진행하는 경매사와 중도매상인들, 젓갈통에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는 짐꾼들이 만들어내는 전경은 한밤중이라고 생각지 못할 정도로 활기차다.
생선비린내 가득한 이곳에 역사가 깊은 신앙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다. 노량진수산시장본당이다. 본당은 1984년 단일업종에 종사하는 뜻 있는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찾고 복음을 생활화하자」는 취지로 「가톨릭 노량진수산시장 베드로회」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신자들은 버려지다시피 한 지하실에 공소를 꾸미고 신부님을 모셔 미사를 봉헌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규칙적인 시장생활로 미사도 드리지 못하는 쉬는 신자를 성당으로 이끌었다. 성전건립기금을 무려 15년 동안 모아 1999년 시장 창고 건물사이에 가건물을 짓고 성당을 봉헌했다.
7개 구역에 350여명의 신자가 함께하는 공동체로 성장했고, 한 개 꾸리아와 아홉 개의 쁘레시디움이 있을 정도로 활동이 활발하다. 게다가 지난 19년 간 입교시킨 영세자가 200여명에 달한다는 것은 시장의 특성을 감안할 때 매우 고무적이다.
『지금이 가장 바쁠 때에요. 경매가 어느정도 끝나면 상인들을 만나러 갑시다』 냉동어류 중도매상으로 일하고 있는 본당 사목회장 박정수(요셉)씨가 인사를 건넨다.
▲ 박정수(요셉.오른쪽)씨와 나종윤(디모테오.가운데)씨가 경매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06:00 경매가 끝난 후
『안녕하세요. 아이구 오늘 광어 조∼오타』 『아유 회장님 오셨네. 찌개 한 술 들고 가시우』
경매가 끝나갈 무렵, 사목회장이 시장상인들을 찾아 나섰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생선회를 뜨는 상인에서 사람 몸체 만한 문어를 집어들고 「오늘은 좀 작은게 들어왔네」라며 인사를 건네는 인심 좋아 보이는 아줌마, 시장에 단 하나뿐인 약국을 운영하는 할머니까지, 모두가 본당식구들이다.
오늘 사목회장이 상인들을 찾아 나선 것은 「성탄맞이 불우이웃돕기 모금」 때문이다. 본당은 매년 세 차례, 즉 사순시기와 추석, 성탄 때 불우이웃돕기 모금 행사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매년 모인 돈으로 본당은 소년소녀가장의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사회복지시설 30여 곳에 생선을 전달하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모금행사에는 신자가 아닌 상인들의 동참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다가 성당을 찾아와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상인들도 생겨났다.
생선을 사회복지시설에 전달한다는 미담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곤혹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곳에서 도움을 달라는 전화가 빗발쳐 미사를 봉헌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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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0 성당 가는 길
성당으로 가는 길은 번잡한 시장골목과는 달리 한적하다. 수산물을 담는 박스나 기타 자재들을 쌓아두는 창고 끝에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천막으로 둘러싼 성당, 이렇다할 간판도 없어 펜으로 「← 성당 가는 길」이라고 써 놓은 게 전부지만 이곳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마음의 안식을 찾는 유일한 공간이다.
본당의 모든 행사는 대부분 오전 11시에 있다. 새벽 2시부터 오전 9시까지 경매와 중도매상인들의 장사가 끝나면 점심시간까지는 시장이 가장 한가하기 때문. 그래서 본당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에 미사를 봉헌한다.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은 시장이 문을 닫기 때문에 토요일 오전 11시 미사는 특전미사로 봉헌된다. 특전미사가 토요일 오전에 있는 성당은 전국을 통틀어 노량진수산시장본당 한 곳뿐이다. 여닫이 문을 제치고 들어서자 성모상이 가장 먼저 반긴다. 11시가 가까워 오자 신자들이 하나둘 성당문을 열고 들어와 바닥에 둘러앉는다. 새벽 추위를 막기 위해 세겹 네겹 껴입은 옷을 가지런히 챙기고 미사 보를 쓴 신자들. 장궤나 의자도 없는, 일어서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지는 성당이지만, 신앙의 열정이 묻어 나오는 힘찬 기도와 성가소리가 울리며 성당은 어느새 따뜻한 온기마저 느껴지는 공간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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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0 쁘레시디움 회합
쁘레시디움 회합을 준비하는 신자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죽을 맛이죠. 20년 장사를 했는데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 건 처음이에요』
한 해 중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겨울철. 하지만 올해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마찬가지다. 꽁꽁 얼어버린 경기 탓인지 시장을 찾는 손님이 뚝 떨어졌다. 성당도 경기를 탄다. 경기가 좋으면 상인들이 바빠서 미사참례자 수가 줄고, 장사가 안되면 생선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미사를 빠지는 상인들이 많다.
그럼에도 성당을 찾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희망이 있다.
『더 한 때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버텨 내야죠. 장사가 안돼 고생을 많이 했는지 매년 맞는 성탄이지만 올해는 더 기쁘네요』 『우리 자식 대학 꼭 붙어야죠. 비린내 난다고 구박하는 놈이지만 그래도 내 자식인데』 『도매상, 소매상, 커피 파는 아줌마 모두모두 장사 잘 됐으면하는게 성탄 바람이죠. 더 바랄 것이 없네요』 너무도 소박한 상인들의 소망이 올 성탄에는 모두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성탄절 새벽 주님 오심을 기뻐하며 캐럴을 부르고 있을 때 이들은 비릿한 생선내음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여기고 성탄절 아침을 가장 먼저 열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판매하는 먹을거리가 모든 이들의 건강과 풍요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을 믿으며 오늘도 열심히 생활합시다』
새벽 2시, 노량진수산시장의 하루가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