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요일의 서정
수 십 년 전부터 서구 교회는 교회 현실을 「성금요일」의 슬픔과 허탈감에 비유해 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무력하게 숨을 거두셨듯이 오늘의 서구교회는 마치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에 맞장구라도 치듯이 무기력하게 스러져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저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요즘 들어 서구의 그리스도교를 「성토요일」에 빗대는 글들을 접한다. 고통스런 죽음의 자리에서 쏟아낸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부르짖음도 「목마르다」는 절규도 이제는 더 이상 부질없게 된 시점, 곧 「25시」의 절망을 말하고들 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장사를 지내서 「돌무덤」에 묻혀있는 처지에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섬뜩한 표현인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대한 희망을 꼭 붙들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텅 비어있는 「빈 무덤」 같은 교회에 「그분은 살아있다」는 기쁜 소식이 언젠가는 다시 울려 퍼질 것이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미련이 아니라고 두둔하고 싶다. 그것은 체념의 상황에서, 그 죽음, 그 무덤, 그 절망의 시점에서 국면을 반전시킨 「부활」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40년만의 최저를 기록했던 2002년도의 신자 증감율 2.8%를 필두로 냉담율 35.1%, 주일미사 참례율 26.5%, 유아영세율 33.4%, 40세 미만 전 연령층 교세의 마이너스 성장 등의 통계치는 미래교회의 하늘에 몰려오고 있는 먹장구름을 예고하고도 남는다.
교회 안팎을 둘러보자. 교회와 신자, 신앙을 흔드는 카오스적 기류가 휘몰아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 70~80년대 승승장구하던 가톨릭교회는 95년 이후 자연종교인 불교의 강세에 밀리고 있다. 또 「신영성」의 이름으로 반그리스도교적인 대체종교(alternative religion) 또는 보이지 않는 종교(invisible religion)들이 가톨릭을 잠식해들어 오고 있다. 기존신자들의 신앙정체성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자긍심이 없고, 흔들리고, 심하게는 신앙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 십상이다. 교회에 대한 실망,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 나아가 타종교의 가르침과 수행에 대한 동경이 위험수위에까지 차오르고 있다. 지식인들은 교회를 속속 떠나고, 젊은이들은 아예 교회근처에 얼씬거리질 않는다.
요컨대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그러니까 「성목요일」 밤의 을씨년스러움이 점점 깊어가고 있는 형국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금요일」의 여명은 잔인하게도 동쪽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그러니까 「성목요일」밤의 을씨년스러움이 점점 깊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무관.
노 시인의 신앙고백
답답하다. 이런 때 필자는 한 노 시인(老 詩人)의 신앙고백에서 위로를 발견한다. 몇 달 전 필자는 구상 시인을 병문안 갔다가 귀한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생활성서」(2001/5)에 게재된 원고를 손수 복사해 곱게 준비해두신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라는 제목의 신앙 고백문이었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내가 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 왜 가톨릭인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를 대변해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먼저, 「내가 왜 크리스천인가?」라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의 크리스천이올시다…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각(知覺)이 들기 이전,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클로스가 머리맡에다 선물을 가져온다는 설화를 그대로 믿었을 때 말고는, 철이 나면서부터는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평안 속에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정신적인 고뇌 속에 있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적인 고뇌」라는 말마디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이는 신앙이 요구하는 삶을 그대로 살지 못해서, 달리말해 「신앙과 삶의 괴리」 때문에 겪는 갈등을 뜻하지 않는다. 노시인의 말을 빌면 이는 오히려 『세속적인 고민이 아니라 구경(究竟)적인 고민』 곧 구도(求道)적인 고민이었다.
『그래서 저는 동경으로 유학 가서도 종교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교의 나라이기 때문에 종교학 커리큘럼 중 절반 이상이 불교경전에 대한 주석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고민은 신의 실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와 아울러 신의 섭리라든가, 교리 자체 등에 대한 많은 회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평안보다는 고뇌에 싸여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난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하며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치닫곤 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을 만큼의 구도여정을 짧은 문장에 담고 있기 때문에 단어들에 배어있는 사연이랄까 속내랄까를 더듬으며 내려가는 것이 괜찮을 성 싶다. 시인께서는 한 때 사제직을 꿈꾸며 신학도가 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길을 바꾸어 일본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셨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를 줄곧 고민에 빠트린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였다. 하여 시인께서는 좌정(坐定)하여 미소 짓고 있는 부처의 「평안」과 십자가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는 예수의 「고뇌」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저주받은 영혼」으로 생각할 정도로 치열하게 갈등하셨다. 그러던 중 시인은 「폴 클로델」 시인을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에 맛들이게 된다.
『그런데 유학 중이던 당시 제가 크게 위로와 위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20세기 노벨상 수상자의 한분인 폴 클로델이라는 시인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은 열아홉 살엔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신비 체험을 했는데 어느 정도 강렬한 체험인가 하면 자기는 성서에 씌어진 것보다도 더 명백히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증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만일 그대들이 신을 참되게 알았을 때, 신은 그대들에게 동요와 불안을 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평안」이 아니라 「동요」와 「불안」을 주는 신(神), 그분이 시인께서 폴 클로델을 통하여 알게 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자 가톨릭의 하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