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란 일차적으로 무엇인가? 당장 떠오르는 것이 백 쁠라치도 신부가 쓴 「미사는 빠스카 잔치다」라는 소책자의 제목이다. 지금은 제목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이 책도 미사가 갖는 나눔의 성격을 강조하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사 신학적 조류를 반영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성체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공간적 위치, 곧 회중을 마주 보며 성체를 축성하고 그 성체를 회중과 함께 나누는 구도와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은 미사가 갖고 있는 공동체적 성격을 참으로 잘 드러내며 이 공동체성을 보다 강화시켜준다고 할 수 있겠다. 미사 주례자가 회중을 마주 보며 전례를 거행하는 새 미사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주례자와 회중 상호간의 원활한 소통(Communicatio) 및 그에 따른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미사 공동체의 공동체성을 강화해 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장점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이 새 미사 전례의 중요한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미사 공동체가 오직 나눔의 공동체일 뿐인가? 미사 공동체는 무엇보다 하느님께 흠숭을 바치는 제사 공동체가 아니던가? 그것도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가장 완전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으로 바치는 희생 제사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 제사는 무엇 때문에 행해지는가? 바로 우리 죄 때문이 아니던가? 이 속죄의 희생 제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나아가서 이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성찬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가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미사는 일차적으로 희생 제사이며 그 다음으로 나눔의 잔치인 것이다. 때마침 이러한 성체 성사의 우선적인 희생 제사적 성격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최근 회칙 「성체성사로부터의 교회」(Ecclesia de Eucharistia)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사의 제사적 성격을 거듭 확인하는 교황의 회칙이 반포된 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난 저 사건, 옛 비오 5세 미사 전례의 공식적인 봉헌을 그저 우연한 일로 치부하며 넘길 수만은 없는 것이다.
미사의 희생 제사적 성격이 그 나눔의 성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어온 심각한 결과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신자들의 죄의식의 결여이며 이에 따른 고해성사자 수의 두드러진 감소라는 지적이 많다. 현대의 대표적인 죄는 바로 죄의식의 상실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비오 11세 교황이 예언자적인 일갈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비오 5세 미사 전례에서는 무엇보다 주례자와 회중이 함께 제대를 향해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성체성사의 이 희생 제사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예컨대, 이 전례에서는 시작 성호경(『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ti, Amen』)을 그은 다음 주례자가 하는 첫 마디가 『Introibo ad altare Dei』(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 가리이다)이다. 그리고 긴 참회예절이 따른다. 따라서 옛 비오 5세 미사 전례의 복원 시도는 미사의 이 우선적인 본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한 하느님 아버지와 미사 참례자와의 화해에 우리의 더 큰 관심을 촉구한다고 하겠다.
간단한 통신문을 적어 보내려고 시작한 글이 너무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라틴어 사용에 관한 언급만 간략히 하고 결론을 내릴까 한다.
▲ 지난 5월 24일 로마 성마리아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간공의회 이전의 트리덴틴미사(비오 5세 미사)가 공식적으로 봉헌됐다.
이 라틴어 미사 봉헌에 대해서는 교황청 경신 성사성의 새 장관인 프란시스 아린제(Fracis Arinze) 추기경이 더욱 더 적극적이다. 그는 라틴어 사용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종교간 대화 경험까지 끌어 들인다(그는 오랫동안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 의장으로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들은 그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언어를 지극한 정성으로 보존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슬람 신자들, 특히 아랍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슬람 신자들의 코란 아랍어에 대한 애착은 가히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코란을 아랍어로 줄줄 외우는 사람이 적지 않단다. 그러면서 라틴어 때문에도 라틴교회 또는 라틴전례라고 불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라틴어를 사용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언어권이 완전히 다른 우리에게는 좀 먼 이야기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라틴어가 자기들 언어의 뿌리 중 하나인 서양 사람들에게는 일리 있는 항변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비오 5세 미사 전례의 복원 움직임은 이 같은 교회 내 라틴어 제 자리 찾기 노력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은 것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가 즉시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에는 비오 5세 미사 전례가 현행의 바오로 6세 미사 전례를 결코 대체하지 못할 것? 약간의 변경은 가능하겠지만? 이라는 현실을 든든한 방어막으로 삼고 싶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습관의 힘만큼 크고 강한 것은 없다. 공의회 이후 40년 동안 매일 세계 도처에서 봉헌되어온 새 미사 전례가 약간의 전통주의자들의 복고지향적 운동에 의해 대체되거나 폐지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그들의 움직임은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널리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하기야 그들의 움직임도 400년 된 습관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와 함께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에 놓여 있는 전통의 흐름을 파악하여 이 흐름 안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 자리를 비판적으로 조명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교회의 역사가 일천하여 유구한 교회 전통의 자세한 면면을 일일이 다 파악하고 이해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든 환경에 사는 우리 교구 사제들에게 바티칸의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처지를 빌미로 최근에 일어난 좀 엉뚱하게 보이는 한 사건을 소개하고 이에 대해 반성적인 해석을 붙여 보았다. 이 의외의 통신문이 우리네 전례 생활을 두루 한 번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