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보잘 것 없는 이를 부르셔서 당신의 계획 속에서 도구로 쓰신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느끼게 됩니다』
삶의 반 이상을 교회 사회복지활동과 함께 하다 2003년 말로 공식 퇴임한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최재선(폴리카르포.62) 자문은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지금까지 끌어오셨으니 그 다음도 마련해 주시리라 믿는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직장을 접고 1970년 미국 주교회의의 해외원조기구인 가톨릭구제회(CRS) 한국지부 활동을 시작으로 사회복지와 인연을 맺은 후 오롯이 한길을 걸어와 한국교회 사회복지활동의 산증인, 사회복지계의 맏형 등으로 불리는 최자문은 「가난함」을 졸업생의 답사처럼 남겼다.
『가난함의 영성을 잃지 않고 깨어있는 자세를 지닐 때 하느님께서는 늘 새로운 생명과 힘으로 채워주심을 깨달았습니다』
실제 그의 삶도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선 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톨릭구제회 활동 시기와 사회복지위원회의 전신인 인성회가 설립되던 1975년을 전후한 5년간은 일주일에 한번도 집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녔다. 가난한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맨발로 뛰며 쌓은 이 때의 경험이 이후 자신뿐 아니라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자산이 된 셈이다.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인성회가 설립되던 때를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떠올리는 최자문은 「선진교회의 도움을 벗어나 한국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선 결단의 시기」로 당시를 회상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눌 게 있음을 몸으로 체험하며 이웃사랑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전기가 되었지요』
1976년 인성회 교구대표자회의에서 한국교회 최초로 「사순절운동」을 결의했던 때도 그에게는 밤잠이 안 올 정도로 흥분으로 맞았던 기억으로 각인돼있다.
이렇듯 인성회 설립이 모색될 때부터 아시아 주교단의 한국 현장체험, 93년 한국교회의 공식적 첫 해외원조, 북한돕기 등 굵직굵직한 사회복지활동의 이면에는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삶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소명의식을 지닐 것을 당부하는 최자문은 자신의 「도구론」을 들려준다.
『풀을 깎기 위한 낫이라면 날만 잘 별러 두면 되는데 그 낫에 온갖 치장을 하려는 우스운 모습을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은 제대로 된 도구가 되기 위해 늘 주님의 부르심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 가난해지려는 노력과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억누르는 구조에 맞서는 예언자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 자신 또한 이런 생각으로 빈민과 노동자 등 약자의 편에 서다 적잖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삶이 걸러낸 삶의 지표는 「시대의 징표」에 대한 민감한 자세다. 징표를 읽고 이에 걸맞는 복음적 응답을 해나가려 노력할 때 생명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징표는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궁극적인 지향점을 두고 나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고만 최자문의 모습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듯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