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말인가? 참 하느님을 알게 될 때에 얻게 되는 것은 「평안」이 아니고 「동요」와 「불안」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역설적인 하느님에게 귀의(歸依)토록 구상 세례자 요한을 이끌어 준 이가 폴 클로델이었던 것이다. 시인에게 폴 클로델과의 만남은 이렇게 그의 그리스도교적 신앙감각(sensus fidei)을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참된 의미의 크리스천이란 부전승(不戰勝)한 듯한 자세의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그분과 함께 사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함께 견디고 참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설명하기를, 선과 악이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고, 사랑과 미움이, 이성과 감정이, 영혼과 육신이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요, 그 십자가를 메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입니다. 제가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 자문하면서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그 시인의 말이 그렇게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점점 눈이 열려 동양 종교지도자들과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지, 그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시인은 이를 「해탈」(또는 「도통」)과 「십자가」의 차이로 압축한다.
『석가모니나 노자, 장자 등은 인간에게 「해탈」이나 「도통」을 요구했지만 나자렛 예수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자렛 예수 자신도 끝까지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이쯤 되면 시인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의인 「십자가」의 비의(秘義)에 천착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십자가의 깊은 뜻을 점점 선명하게 헤아려 나간다.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예수님은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으니 모두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초연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정말 나자렛 예수야말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고, 그 인간 자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예수는 해탈이나 도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아주 인간적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스스로가 불안하고 고뇌에 차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 자체의 영적인 능력에서 오는 신비 체험이나, 도통과 해탈과 같은 인간적 초연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그만한 그릇이 아니기에 초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이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심오한 사상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여의치는 않지만 핵심은 이렇다.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해탈, 도통, 초탈은 고통을 피하고 평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솔깃하게는 들리지만 그게 어디 범상한 「그릇」들에게는 가능한 길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그런 고통의 현실 한 복판으로 들어가 자신의 몫은 물론 남의 몫까지 대신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한 마디로 「유한성(有限性)에 대한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동양종교에서는 「무한성(無限性)」을 꿈꾸고 스스로 무한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시인은 「크리스천」으로서 오히려 「유한성」을 인정하고 거기서 구원의 가능성들을 희망하는 길이 옳다고 보셨다. 이를 시인은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 빠져나올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 벗어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불안과 허망의 잔을 / 피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 감추어져 있음을, /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 나는 또한 믿고 있다』
▲ 구상 시인은 인간의 욕망, 고뇌, 불안 등을 「유한한」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것들을 짊어지고 예수님을 뒤따라야 구원될 수 있음을 믿는다.
시인의 고백은 그대로 인생역정이었다. 구상 시인께서 걸어온 길은 구도자의 길이었다. 아니, 시인은 구도자보다 더 치열하게 종교의 본질을 탐구하셨고, 올바른 삶의 길을 모색하셨고, 하느님을 향한 영성을 갈구하셨다.
서두에서 하필 원로 구상 시인의 신앙고백을 들먹거리고 있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것은 시인께서 사회의 명사(名士)로서 당당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가톨릭인으로 고백하셨기 때문이며, 그가 고백한 신앙이 치열하고 진지한 평생의 구경(究竟) 곧 구도(求道)의 결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시인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 더 인정받으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은 누구보다 민족성이 투철한 시인이시고 누구보다 가톨릭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한 시인이시다. 죄책감과 동시에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