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로 돌린다면, 『에이, 아무렴 그렇지』 할 테고, 기적이라고 우긴다면,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물음표가 달라붙을 것이다. 어쨌든 하느님은 마음만 먹으신다면 우리를 언제든 배불리 먹이실 능력이 있다는 성서적 교훈으로 읽으면 그만이야 하고 두 손 털고 덮어두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우선 이 기록을 비유라고 보기에는 정황에 대한 사실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그날은 하루 종일 병자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예수님도 제자들도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저녁이 깊어서 한적한 곳을 찾아 한숨 돌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아갈 생각을 안 하고 계속 따라 붙자,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마태오 14, 14) 끼니를 챙겨주셨다고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네 복음서에서 한결같이 기록하고 있는 데다 그날 그 사건의 증인이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다니까 섣부른 거짓말을 지어냈다고는 보기 어렵다. 성서 구절을 읽다보면 그림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다(마태오 14, 13~21 / 마르코 6, 30~44 / 루가 9, 10~17 / 요한 6, 1~15).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진 것을 모두 털어보았더니 빵 다섯 덩어리에 생선 두 마리가 전부였다. 필립보의 머릿속 계산으로는 200 데나리온은 있어야 한 입씩 허기를 면할 수 있단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빵과 생선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나누어주라고 분부하신다. 필립보의 계산대로라면 남자만 쳐도 빵 하나를 1000 등분하고 생선은 2500 토막으로 쪼개야 한다. 거의 티끌 수준이다. 이 정도 분량이면 혀끝에 올려도 먼지인지 생선인지 맛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들 배불리 먹고 또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를 채웠다니 혹시 전자 현미경을 이용해서 짠 나노 바구니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떼 지어 예수의 뒤를 좇아왔을까? 이들은 병 고침의 기적을 목격하거나 또 소문에 이끌려서 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설교 대신 음식을 베푼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이 행복한 포만감을 굳이 영적인 양식이나 말씀의 배부름이라고 돌려서 읽을 까닭이 있을까?
▲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베리 공작의 기도서」 168쪽 림뷔르흐 형제의 세밀화. 1410~1413년, 샹티이 콩데 미술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빵과 포도주를 희생과 구원의 상징으로 읽었다. 가타콤바 벽화에서도 광주리에 담긴 빵이나 식탁 위의 포도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빵과 생선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등장하지만,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어로 쓰고 머릿글자를 붙이면 「생선」을 뜻하는 「익투스(Ictus)」가 된다고 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미술에서 처음 선보인 것은 5세기경의 일이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의 지팡이를 빵과 생선에 대는 모습으로 등장하다가, 차츰 손을 들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특히 배경의 금박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풍경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천년 뒤, 15세기부터의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빵과 포도주를 희생과 구원의 상징으로 읽었다. 가타콤바 벽화에서도 광주리에 담긴 빵이나 식탁 위의 포도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빵과 생선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등장하지만,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어로 쓰고 머릿글자를 붙이면 「생선」을 뜻하는 「익투스(Ictus)」가 된다고 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미술에서 처음 선보인 것은 5세기경의 일이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의 지팡이를 빵과 생선에 대는 모습으로 등장하다가, 차츰 손을 들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특히 배경의 금박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풍경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천년 뒤, 15세기부터의 일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엉뚱한 기적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물으신다. 그리고 거두어들인 몇 덩이의 빵과 생선을 놓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이야기는 비유와 현실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그 경계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춤을 춘다. 구약 시절 배고픈 유랑 민족의 주린 배를 달래주었던 만나는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꿀과자였다. 그러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는 아무것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몫의 소유를 버리고 더불어 나누는 동안 배부름과 풍요가 다가온 것이다. 고마움과 이웃사랑은 덤으로 주어진 후식이다. 여기서 기적의 참뜻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뺄셈의 기적이다. 나눔과 사랑의 아름다운 방정식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아무도 모르게 우리 마음속에 기적의 폭죽을 터뜨리는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계신다.
「베리 공작의 기도서」에 그려진 그림에서 예수님은 푸른 겉옷을 입고 일어서 있다. 한 어린 소년과 제자 하나가 생선과 빵을 담은 접시를 대령했다. 소년은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된 「웬 아이」(요한 6, 9)일테고, 제자는 필립보인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인지 분명하지 않다. 예수님은 한 손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그런데 표정이 무척 침착하다. 이 조촐한 음식으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을까, 추호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다.
그곳은 마침 풀이 많았다는 성서의 기록대로(요한 6, 10) 비탈진 언덕배기의 뗏장이 그림의 배경을 차지했다. 예수님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던 것일까? 예수님은 또 이런 말도 하셨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48?51). 일찍이 멜키세덱은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피를 대신해서 빵과 포도주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천 명을 먹이신 그날의 기적은 또 하나의 성찬식으로도 불린다.
▲ ‘라자로의 부활’ 「베리 공작의 기도서」 168쪽 림뷔르흐 형제의 세밀화. 1410~1413년, 샹티이 콩데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