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한 골목길에는 매일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땡땡땡」 귀를 자극하는 소음이 아니기에, 거리까지 새어나오는 종소리는 청아하고 맑기가 그지없다. 흩어졌다 모이는 종소리는 곧이어 「사랑의 인사」, 「도레미 송」의 고운 선율을 빚어낸다.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 다다른 곳은 언덕 배기에 자리잡은 흰색의 아담한 3층집. 이곳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산하 정신지체 소녀들의 재활터전인 「맑음터」(원장=권원란)다. 지난 1988년 4월 문을 연 맑음터에는 현재 30여명의 여성 정신지체인이 재활의지를 다지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연습실 문을 가만히 열자, 8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맑고 경쾌한 종소리가 넘쳐 흐른다. 「쉿, 연습중이에요」라는 지휘자의 부탁에 따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한 단원이 핸드벨을 든 팔을 앞으로 쭉 뻗어 큰 원을 그리며 손목을 살짝 꺾는다, 「딩」. 곧바로 핸드벨을 다시 몸 쪽으로 당기면서 천천히 몸에 대자 소리가 사라진다. 이번엔 옆에 있던 단원이 작은 원을 빠르게 그린다. 「동」. 간혹 음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는 이들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진지하다. 반짝이는 핸드벨처럼 단원들의 얼굴도 밝고 환하다.
하얀 면장갑을 낀 양손에 금빛 종을 들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맑음터 핸드벨콰이어」. 지휘자 임정희(데레사.33.사회복지사)씨를 비롯해 1∼3급의 정신지체를 가진 11명으로 구성된 핸드벨 연주단이다.
벨 하나에 음이 하나인 악기. 한 명이라도 빠지면 연주가 불가능하고, 혼자서는 연습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핸드벨은 개인기보다 화합과 협동을 중시한다.
그러나 단원 대부분은 악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음표에는 색종이를 붙여 각자의 차례를 표시해 두었다. 빨간색은 「미」, 주황색은 「레」다. 지휘자 선생님이 두루마리 악보를 넘겨가며 한음 한음 차례로 짚어 주면, 자기가 맡은 색깔이 나올 때 종을 울리는 방식이다.
맑음터 벨콰이어의 식구들은 1995년 처음 종을 잡았다. 비교적 장애가 가벼운 10여명이 모여 재활치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정상인들도 쉽지 않은 핸드벨 연주. 주위에서는 「장애인들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걱정은 격려로 변했다. 이젠 가톨릭 기관 단체의 후원행사나 캠페인, 모금행사에 있어 이들의 연주는 빠질 수 없는 단골무대다.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나 장애인 합동결혼식 등 각종 장애인 축제에서도 이들은 예약 1순위다.
단원 1명은 보통 2, 3개의 음을 맡는다. 1주일에 두 번 연습을 하지만 음이 틀릴 때는 제대로 맞을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실력 차이도 천차만별이라서 한 명이 틀리면 하루 종일 연습할 때도 다반사다.
특히 단원들은 음정에 익숙지 못하고, 박자 감각이 부족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야 한다. 음마다 종의 크기와 무게가 달라 단원들은 한 곡을 연주하고 나면 팔이 뻐근해 온다.
그만큼 연습은 힘들고 고된 과정이다. 한 곡 멋들어지게 연주하려면 대략 1년은 걸린다. 그러나 「징글벨」 등의 캐럴을 비롯해 「브람스 멜로디」, 「A Lover’s Concerto」 등 벌써 7∼8곡을 완성했다. 한 곡이 완성되고 또 새로운 곡을 시작할 때마다 선생님도 단원들도 자꾸만 욕심이 난다.
수녀님이 되고 싶다는 정신지체 3급의 김지연(가명.글라라.24)씨는 『처음엔 너무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이젠 어떤 연주를 해도 자신 있다』며 『연주가 끝난 뒤 박수를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연습 중 자꾸만 틀리는 게 멋쩍은지 연신 웃음을 짓던 정신지체 3급의 김수민(가명.사비나.22)씨는 『그래도 하루 중 핸드벨 연습시간이 제일 기다려진다』며 환하게 웃었다.
『핸드벨은 단순한 「종치기」가 아니에요.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피아노의 건반과 같아요. 그래서 각자의 책임감과 협동심 없이는 하모니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시종일관 「협동심」을 강조하는 임정희 선생님. 그는 『장애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학습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완주를 할 때마다 이들이 느끼는 성취감과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며 『특히 도움만을 받던 장애인들이 자신들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한다』고 강조했다.
저녁 7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솔도」로 마무리되는 「도레미 송」의 완주로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다. 이윽고 기다리던 저녁 식사시간. 연습 내내 긴장했던 단원들도 이 시간만큼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약간은 어눌하지만 막힘 없는 이야기꽃을 피운다.
「하나됨」을 상징하는 악기 핸드벨. 어느새 맑음터의 열두 천사들은 「여럿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핸드벨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 한 곡 멋들어지게 연주하려면 1년은 걸린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하다. 도움만 받던 자신들도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기에. 맑음터의 열두 천사들은 오늘도 「하나됨」을 이룬다. 단원들이 연습 도중 포즈를 취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핸드벨을 아시나요
「천상의 소리」라 불릴 정도로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자랑하는 핸드벨(Hand Bell)은 영국에서 높은 교회 탑에 걸려 있던 여러 개의 커다란 타워 벨을 치는 연습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16∼17세기쯤 독자적인 악기로 발전한 구리, 주석 합금 종(鐘)이다.
다양한 음계의 크고 작은 종을 흔들어 환상적인 소리를 만들어 내는 핸드벨은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돼, 현대에 이르러서는 7옥타브의 음까지 낼 수 있도록 개발되는 등 독자적인 타악기로 자리잡고 있다. 연주하기가 쉬워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주가 가능하며, 주법도 다양해 맑은 종소리부터 목금 같은 경쾌한 소리까지 여러 음색을 낼 수 있다.
국내에는 1974년 침례교 선교사인 맥 다니엘 목사가 들여온 이후 1985년 한국핸드벨협회가 결성됐으며, 가톨릭에서는 정신지체장애인의 재활치료를 위한 악기로, 개신교에서는 예배 전례용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핸드벨은 아름다운 울림과 맑은 소리를 통해 장애인들에게 정서적 안정은 물론 또 다른 배움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핸드벨 합주는 연주자들의 협동심과 자아 성취감을 높여 장애인들의 음악치료 적인 면에서도 매우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13∼14명으로 구성된 핸드벨팀 120여개가 성당과 교회,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중이며, 가톨릭 교회 산하에는 정신지체인 단체인 애덕의 집, 가난한 마음의 집, 비둘기 교실, 바오로 교실, 사랑손, 맑음터 핸드벨콰이어와 일반 단체인 가톨릭대학교 핸드벨콰이어 안젤루스, 대구 뿌에리 깐또레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와 동성중학교 핸드벨 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