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의 나이를 넘어선 지금도 하느님 뜻에 맞갖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조금이라도 더 그 분께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만큼은 누구 못지 않다. 다만 예전에 비해 길눈이 새롭게 트여 하느님께로 향해 나아가는 길이 한가지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신 것은 늘그막에 주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은총이 아닌가 싶다.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고향을 떠나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 세상을 원망한 적도 있지만 이런 나를 거두어주신 것도 오롯이 주님의 은총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서울에 올라와 고학을 하며 시쳇말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숱한 난관을 이겨낸 그 때의 경험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나를 지켜주고 일으켜준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힘들게 살아온 과거가 밑거름이 되었을까, 당시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과거의 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를 태우는 학생들을 위해 야학에서 국어와 주산 등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일생 일대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것은 두고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이지만, 지금의 아내(표태옥?수산나?74)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수산나의 집은 선대에 치명순교하신 할아버지가 계실 정도로 5대째 내려오는 독실한 구교우 집안이었는데, 이런 집안의 사람을 배필로 맞이하게 해주신 것도 주님의 안배이셨을까. 나는 아내 덕에 그토록 오랫동안 떨치지 못하고 있던 하느님 존재에 대한 의심을 말끔히 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욱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은 덕에 적잖은 어려움을 감당해내야 했던 아내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나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지금껏 하느님을 향한 길을 함께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기만 한 나를 대신 채워준 아내의 공이 컸음을 고백하고 싶다.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 세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이라고 했던가. 아내는 내 인생의 든든한 반려이자 가장 가까운 신앙의 스승이었다. 아내 자랑을 하면 팔불출 가운데 든다고 하지만 수도자 못지 않은 열심한 아내의 모습은 언제나 내게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지금껏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이 이사를 다녔지만 아내는 그 때마다 여건이 괜찮은 숱한 집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어김없이 성당 근처에 있는 집을 고집했다.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묵주를 손에서 놓는 일이 없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뵈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은 적도 없지 않다. 기도하는 일 외 세상일에는 무관심하게까지 보이는 아내에게 한번은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와이셔츠에 단추 떨어진 것도 모르고 밤낮으로 묵주만 돌리고 앉았으니…』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미안하고도 스스로 무안해지는 일이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아내는 흔들림 없는 그 열심한 삶으로 「누가 뭐래도 하느님은 분명히 계시다」는 확신을 내게 심어주었던 존재다.
근래 들어 이혼문제를 비롯해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버리는 기아(棄兒)문제, 청소년문제, 한 가족을 제 손으로 죽이는 일 등 가정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는 세태를 보면서 신자로서 적잖은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나를 비롯한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자성을 하게 된다. 신자들이 빛과 소금으로서 세상 곳곳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제대로 심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생각에서다.
부족한 내 삶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가정사에 부끄러운 생각까지 털어놓았지만, 하느님이 이뤄주신 가장 작은 교회인 가정에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것은 내 신념과도 같다. 특히 가정의 핵심인 부부로부터 하느님 구원사업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체험한 나로서는 부부가 누구보다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에게서 늘 새로운 스승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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