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곧 전략인 것이 요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지(그림자, 겉모습)만으로는 승부를 걸 수 없는 곳이 있다. 가정처럼 가까운 이들에 의해 형성된 공간에서이다. 이미지만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 노출되어 생활해야하고, 또 그렇게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에 유비무한이라는 방어기재 역시 쉽게 해제되고 만다. 사랑하는데도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각자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지속시킬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는 이미지 뒤에 숨겨놓은 진짜 맨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은 곧 갈등과 고통의 시작이기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론의 마지막 부분인 「하느님의 등장」(38, 1~42, 6) 후반부(「하느님의 두 번째 연설」(40, 6~41, 26)과 「욥의 응답」(42, 1~6)으로 구성됨)은,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닌 서로의 맨 얼굴을 마주한 욥과 하느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을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내부의 질서와 정체성을 찾게되는 욥의 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40, 6~41, 26)
이 부분은 하느님의 폭력적 이미지(9장 참조)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하느님이, 욥이 오해해온 것처럼 무차별하게 인간에게 폭력을 전가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과 폭력의 세력(괴물 「베헤못」 혹은 「레비아탄」으로 은유됨 40, 15~16. 19 참조)을 굴복시키고 조정하는 분임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혼돈의 세력을 조정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역시 당신의 피조물들이라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시선을 벗어나 살 수 없는 피조물이듯, 아무리 강력한 악의 세력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이다(40, 15 이하). 이 부분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이 이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완전히 쳐 없애지 않으시고), 어느 시대에도 예외 없이 존재해온 악과 부조리의 잔존(殘存)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자는 인간의 삶과 악이 언제나 공존하게 되어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은 하느님에 의해 컨트롤되고 극복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욥의 답변(42, 1~6)
욥은 무죄한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과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부정해온 것이 사실은 자신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이기적 판단이요 오만이었음을 깨닫게된다. 이러한 반성과 함께 욥은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하느님이 「소문으로 들어 알아온 분」이었음을 고백한다(42, 5). 「소문으로 알게된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체험된 하느님일 뿐, 사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아무리 성서를 많이 알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해있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신학자들의 화려한 이론에 의해 전달된, 즉 「소문에 의해 전달된 하느님」만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발생하는 모순이기도 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만나 구체적 관계로 들게 한 사건은 「원체험」이라 불리는 출애굽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물론 그 이전에도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그들의 하느님」이었을 뿐이다. 즉 이스라엘은 「누구 누구의 하느님」(소문으로 알게된)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실존에 의해 체험되어지고 고백된 「나의 하느님」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되고, 비로소 하느님과 구체적인 관계에 들게된다. 이 관계의 가시적 표현이 시나이 계약임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욥 역시 이제 소문에 의해 「이미지」로만 알아온 하느님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직접 체험된 하느님을 알게되고 소중한 내적 평화를 간직하게 된다.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은 삶의 문제를 타인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소문에 귀기울일 필요 없이 자신의 내면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고요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백 번 물어보는 것보다 내가 체험한 단 한번의 만남이 소중한 이유,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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