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시인의 구도여정
내친김에 노 시인의 구도여정 몇 구간이라도 편승(便乘)해 보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든다. 시인의 근간 「마음의 눈을 뜨게하소서」(바오로 딸, 2001)에 실린 안토니 티그(수사.서강대 교수)의 말을 따르면 시인의 시세계를 기웃거림으로써 이 욕심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구상의 일생은 진리의 모색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래서 그의 시는 그 길을 따라간 발자취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 구상의 모색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진리에 대한 것이었다』
구상의 시에는 종교적 진리를 모색해 나간 「발자취」가 서려있다. 그런데 시인이 오랜 모색 끝에 안착한 종교가 다름 아닌 가톨릭이었다. 그것도 알짜배기 가톨릭 신앙이었다. 티그 수사의 말을 더 들어보자.
『몇 년에 걸친 일본 유학시절, 그는 동서양의 종교철학의 포괄적 표현과 현대 유럽 철학의 급진적 회의론과 절망을 접하고 충격과 함께 깊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의 충격을 통해서 비로소 그는 타성적(惰性的)이 아닌 신앙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렇다. 「깊은 의문」! 신앙이란 모름지기 그 의문의 늪을 통과해서 도달한 것일 때 그 진실성이 빛난다. 그래야 비로소 신앙은 「타성」을 벗어난다. 이런 것이 신앙이다. 집안에서 대물림으로 주어졌다고 해도 그것을 팔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신앙은 치열하고 까다로운 저울질을 통해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혹자는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이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이는 「의문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굳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내세우지 말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것을 바라는 마음에 얄팍한 「속임수」가 파고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몸으로만의 「체험」에는 거짓과 혼돈과 착각이 끼어들 수 있다. 그러기에 뉴에이지나 신영성 운동에서 정체불명의 심신체험을 「신체험」이라 주장하며 팔아먹어도 그것을 「하느님 체험」인양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서 시대 때부터 있어온 일이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로는 「영의 식별」에 대해서 단단히 일러두었을까.
「보지 않고」 믿는 길, 곧 「몸으로 체험하지 않고도」 믿는 길은 둘 중 하나다. 눈 딱감고 믿든지 이성과 양심으로 철저히 따져본 후에 믿든지이다. 어설픈 회의가 사람 잡고 진리를 그르치는 법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어떤 의문을 던져도 여전히 진리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본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종교학」을 전공하던 시인에게 일차적으로 넘어야 할 관문은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가」하는 물음이었다.
『하느님은 계시고, 그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하느님이 사랑의 성품을 지닌 인격신이시다』라고 믿는 가톨릭 신앙이 옳은가 아니면 『우주 곧 천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본래 있었고, 절대신(창조신, 인격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에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어서 오랜 윤회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신적인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 불교 신앙이 옳은가? 이 물음이 당시 청년 종교학도 구상을 줄곧 괴롭혀온 물음이었다. 시인께서는 불교의 가르침에 솔깃하여 가톨릭에서 도망도 쳐보고 생각으로 하느님을 죽였다 살렸다하기를 반복해 봤지만 실재하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시인께서는 청년시절 자신이 겪었던 신앙의 방황을 대변하는 시로서 20세기 초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를 즐겨 꼽으신다. 아편쟁이로 빈민굴을 헤매다 죽은 시인 톰슨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고뇌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 그로부터 도망쳤다. / 내 마음의 얽히고 설킨 미로에서 / 눈물로 시야를 흐리면서 도망쳤다. / 나는 웃음소리가 뒤쫓는 속에서 / 그를 피해 숨었다. /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 유유한 속도, 위엄 있는 긴박감으로 / 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 /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들려오는 한 목소리, /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
(후략)』
사람이 무엇인가에 공감을 할 때에는 자신 안에 바로 그 「무엇」이 있다고 여길 때이다. 구상 시인께서는 이 시를 이렇게 공감한다.
『이 시인은 하느님을 하늘의 사냥개로까지 비유했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하늘의 사냥개처럼 아무리 달아나고 뿌리치고 숨어도 자꾸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시인 자신은 신을 멀리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도 따라오고 뒤쫓아오고 벗어날 수 없는 하느님을 마치 저주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처절한 싸움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느님을 저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의미의 신의 실재를 접하게 하는 시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저 역시도 동경 유학 시절 하숙집 다다미 방에서 날마다 신의 장례식을 지내다가도 결국에는 신의 실재에 도달하는, 그런 체험의 모습이 저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날마다 신의 장례식」을 지내던 저 혹독한 시험의 시절이 있었기에 시인에게 빛나는 가톨릭 신앙이 영글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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