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8월부터 정식 시행 될 「외국인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고용허가제)은 그간 불법이었던 이주노동자 고용을 합법화한 것으로 외국노동인력과 연관된 법적.제도적 체계로는 처음 도입된 것이다. 지난 해 7월 31일 10여년 간 줄다리기를 벌이던 고용허가제가 국회를 통과하자 종교.시민단체와 인권단체들은 그간 문제돼 왔던 인권침해, 불법체류, 송출비리, 3D업종의 인력난 등을 해결할 대안이라며 일제히 환영했다.
하지만 정부가 국내 거주 이주노동자 30여 만명에 대한 일제정리를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지난 해 9월 1일부터 3개월 간 18만 4천여 명의 노동자가 합법화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정부는 11월 17일부터 국내체류기간이 3년 이상인 출국대상자 12만여 명에 대한 단속을 시작했다.
단속이 시작된 후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한 서울 가리봉동과 경기도 일대 공단에서는 도망치는 불법체류자와 단속반의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단속을 피해 몸을 숨긴 외국인 노동자 중에는 추운 날씨로 동사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도피자금 마련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자살한 노동자도 9명에 이른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잠적해 버려 대체인력을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 중 일부는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어떤 공장에서는 벌금을 감수하고 이주노동자들을 숨겨주며 일을 시키고 있다.
정부 정책은 갈팡질팡이다.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가중되자 제조업종에서 일하는 불법취업자는 단속대상에서 제외했다. 중국 동포들의 국적회복운동이 시작되자 중국동포에 대한 단속을 한시적으로 유예했다. 단속에 적발된 불법체류자들의 수용시설이 부족해 하루 단속인원을 500명 이하로 유지하겠다고 했다. 최근에는 2003년 입국한 이주노동자 모두를 합법화하겠다는 발표가 언론에 보도됐다.
현재 정부의 단속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1월 15일까지 출국기간을 연장하고 그 이후부터 대대적인 단속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지만 결과가 어떨지는 미지수다.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만난 살람(27)씨는 『정책이 오락가락하다보니 출국하려던 사람들도 더 버티면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는다』며 『농성장에서 쫓겨나더라도 교외나 시골로 도망가 숨어 있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단속을 통해 불법체류자를 줄여보겠다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정부의 갈팡질팡 정책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하는 꼴이 돼 버렸다. 이들 대부분은 입국 당시 진 빚을 채 갚지 못한데다 본국에 돌아가도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범죄나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 인권 등 사회문제로 확대될 우려도 있다. 게다가 강제추방, 단속과정에서의 폭행사건, 시위.농성 강경 진압 등으로 인한 인권침해는 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 있어 자칫 국제문제로 번질 염려도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회의 노력
이런 상황에서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와 전국 14개 외국인사목 담당 대표 사제들이 발표한 성명서 「이주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성찰하며」는 고용허가제 국회 통과 이후 불거진 갖가지 사회문제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교회의 의지를 표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성명은 『이주노동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존엄한 인권과 품위를 지난 사람들』이라며 『현행 고용허가제를 이주노동자들과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영세 사업주들 모두에게 정당하고 합리적인 법률이 되도록 개정해 주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다수가 일할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는 내용으로 고용허가제가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명서의 골자다. 하지만 이번 성명발표가 단순히 발표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한 외국인상담센터의 실무자는 『늦은 감은 있지만 고용허가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교회가 내세웠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며 『하지만 고용허가제를 개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회는 개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이제부터라도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간 개신교 등 타종교와 시민사회 단체가 고용허가제 법안 개정을 위해 농성과 시위 등 강경 일변도로 나가고 있던 것과 달리, 교회는 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리적인 방안 모색에 힘써왔고 이는 오히려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주교회의 이주사목위 등 이주노동자 사목 관계자들은 노동부.법무부 장관을 연쇄적으로 만나 실질적으로 개정 가능한 법안을 제시했으며, 일부 사항에 대해서는 정부의 수용을 얻어내기도 했다.
▲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노동허가제의 합리적인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허윤진 신부는 『정부의 정책이 계속해 바뀌고 있어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며 『제도의 문제점을 정부가 하루빨리 파악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개정방안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들고, 자신이 돌리던 공장기계에 몸을 매고,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어 한국 땅을 떠나는 이주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그들은 값싼 임금을 받고 톱니바퀴 처럼 돌아가는 기계가 아닌 한 인간이다. 이들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정부당국에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 우리 신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일 것이다.
■ 이주노동자 공동체 표정
“귀국해도 생계 막막 대부분 숨어 지내”
지난 11일 오전 서울 보문동 서울대교구 노동사목회관 3층.
40여명의 남미 이주노동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지난 해 9월까지만 해도 매주일 열리는 남미공동체 미사에는 어림잡아 100여명 가까운 이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이 시작된 후 미사 참례자 수가 급격히 줄었다.
단속 대상인 3년 이상 국내 체류자 대부분이 미사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부 방침에 따라 자진 출국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내고 있다.
▲ 이주노동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단속이 시작된후 참례자가 많이 줄었다.
페루에서 온 한 노동자는 『친구들 중 네 명이 김포에 방을 얻어 함께 숨어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생활비도 떨어지고 일자리도 구할 수 없어 돈이 필요하다고 전화가 와 20만원을 꿔줬다』고 말했다.
이들이 미사에 오지 못하고 숨어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본국으로 귀국하면 생계가 막막한데다 다시 한국에 들어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남미공동체 미사에 이어 열린 베트남공동체 미사에서 만난 요셉(32)씨는 『일단 귀국을 해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신부님들께는 미안하지만, 빚도 못 갚고 돌아가면 그곳에서도 어차피 살기 힘들다』며 『절대로 고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 공동체 노동자 중 불법 체류자로 분류 돼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노동자는 약 40%선.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 잘못된 정부의 정책으로 교회를 떠나 음지로 음지로 숨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