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인을 향한 노 시인의 연민
저렇듯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인간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자신의 건재(健在)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하늘의 사냥개」로 비유한 프랜시스 톰슨에게서 구상 시인은 청년시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아주 아주 옛적에, 정확히 햇수를 따지자면 약 3000년 전 하느님 안전(顔前)으로부터 피신하려다 헛고생만 한 또 하나의 실패자가 있다. 실패한 도망자 다윗은 이렇게 실토한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그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어둠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보아도,/빛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 달라 해보아도,/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중략)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습니다』(시편 139, 7~15)
신으로부터 도망치고픈 심정이 어찌 두 시인, 아니 세 시인에게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는 감미로운 유혹에 덜컹 빠져들고 있는가. 하느님의 존재를 곧잘 믿었던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동시대인들이 「그(하느님)로부터 도망치는」 도망자로 이 거리 저 골목을 헤매고 있는가. 죄가 너무 크고, 절망이 너무 깊어서 감히 하느님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 마음이 너무 굳어서 불행한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부질없는 노릇인 줄 알면서도 사춘기 아이들이나 걸리는 「이유 없는 반항」병, 가출병에들 걸려서 실제적 삶에서 하느님을 등지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뿐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하느님을 살해하여 매장해 버리고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영적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헌데 구상 시인은 스스로에게도 하느님의 「실재」에 의문을 갖고 「날마다 신의 장례식을 치르며」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동시대인(同時代人)의 비극을 잘 알고 있다.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가슴 속에서는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각별한 연민(憐憫)이 울고 있다. 시인은 그 안타까움을 이렇게 노래한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인류의 맹점(盲點)에서)
이처럼 「시방 세계」는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경합하는 가운데 「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거리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온갖 도락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이 것이 노시인이 바라본 오늘날 세계의 모습이다. 시인은 이를 「칠흑」의 「어둠」이라고 잘라 말한다.
노시인이 보기에 비극은 다른데 있지 않다. 사람들이 저마다 「황금송아지」에 사로잡혀 봐야할 것을 못 보는데 있다. 사람들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은 욕심에 저 물질의 우상(偶像)안에 우주의 창조주요 역사의 섭리자인 하느님을 가두어 둔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떠느라고 저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음」에 귀기울이지 못하는데 있다. 아니 일부러 귀를 무언가로 틀어막는데 있다. 그리하여 저 톰슨 시인의 귓가에 뚜렷이 들려온 『나(하느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는 저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애써 흘려버리려는데 오늘을 사는 이들의 비극이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경이란 「허허-」, 「저러-ㄴ」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노 시인이 노래하는 가톨릭 신앙
그게 언제였을지는 아무도 모르되 시인께서는 「처절한 싸움」 끝에, 오랜 방황과 모진 사상적 편력을 마치고서 마침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는 경지를 지나 「은총」에 눈을 떠서 눈물까지 흘릴만큼 되었다. 이를 시인은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제사 비로소/두 이레 강아지만큼/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그렇듯 안까까움과 슬픔이던/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사 하늘이 새와 꽃만을/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눈물로써 감사하노라 (하략)』
시인께서 「두 이레 강아지 만큼」 눈 떠서 접한 「은총」은 이렇게 시인의 세계관과 삶의 자세를 바꾸어 놓았다. 곧 냉철한 이성으로 생로병사에 깃든 영원의 편린을 꿰뚫어 보게 하였으며 천진의 감성(感性)으로 「하늘」의 보살피심에 눈물 흘리게 하였다. 이것이 노시인이 이즈음 노닐고 계신 신앙의 경지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가톨릭 신앙의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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