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직에서 물러난 후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스스로 피땀 흘리며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친척동생이 하던 조그만 회사에 적을 두고 호구지책을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시장 개척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샤프의 2인자라 할 전무 일행이 찾아온 것이다. 샤프는 당대 최첨단을 달리고 있던 기업이었기에 그런 기업 책임자의 방문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당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하나같이 샤프와 합작을 원하고 있던 터에 굳이 나같은 이를 찾은 그들의 모험과도 같은 선택은 지금 생각해봐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뿐이다.
1971년 말 최종 결정을 위해 일본 본사를 방문해달라는 말에 나는 걱정에 싸였다. 내 용기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하느님께 매달려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나를 어디로 이끌고자 하시는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서 어찌나 떨었던지 도중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마저 일었다. 그러나 일본샤프 본사가 가까워지자 차분히 가라앉는 모습에 나 자신조차도 놀랄 지경이었다. 회의실에서 중역들이 함께 한 자리, 나는 30분 넘게 진행된 면담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한 마디도 더듬지 않고 일본어로 한국 경제사정 등을 설명했다 하니 지금 생각해봐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일본샤프 사장이 경리상무를 통해 한국 투자를 지시했는데, 그날 밤 전무의 초청을 받고서야 치밀하기 그지없는 사장이 단번에 투자를 결정한 일 또한 초유의 일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또 한번 놀랐다. 투자 유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움직이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에 그 때의 일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하다.
자본을 들여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샤프제품의 판매회사를 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자」라는 개념마저도 생경한 것이 당시 우리 현실이어서 수입해온 전자제품이 쌓여만 갔다. 이렇게 앉아만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전국을 돌며 몸소 판매에 나서게 됐다. 당시 나는 푸대접을 받으면 살아온 세월이 무의미해져 죽음을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처음 찾아간 경북도지사를 비롯해 부산시장 등 기자시절 친분이 있던 이들 모두가 내 일을 자신들의 일인 양 도와주려고 나서 큰 힘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나는 일본샤프에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됐다. 단 10평이라도 좋으니 우리 손으로 직접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웠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 뜻이 받아들여져 1972년 7월 8명으로 벌인 일이 지금의 (주)한국샤프의 시작이다. 당시 나는 이 일을 시작하며 함께 한 이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다. 바로 봉급날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때에 봉급을 주겠다는 것과 자의가 아닌 타의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마음을 굳혔던 것은 월급날을 무시하거나 사람을 함부로 대해 적잖은 사람들을 죄의 길로 내몰기 일쑤였던 당시 우리의 기업 풍토와도 무관치 않다. 이 약속을 못 지키게 되면 그 날로 일을 접겠다는 각오로 회사를 운영했는데 지금껏 한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은 것은 돌아보면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번은 도저히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혀 죽을 마음까지 먹고 아내와 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적이 있다. 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믿고 따라준 이들에 대한 가책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통신사 사장님이 근 1년 동안 편집국장 자리를 비워두고 회유를 해오던 터였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울음을 그친 아내가 직원들의 두달치 월급이 든 통장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절대로 좌절하지 마세요. 당신은 정직하니까 하느님께서 다 도와주실 거예요』라는 격려와 함께. 그 때 또 한번 나는 아내의 마음씀씀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 숱한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내의 기도와 격려의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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