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수도자가 뭔지도 몰랐지. 그저 남신부님께서 하시는대로 믿고 따랐을 뿐이야』
1935년 12월 8일 경북 영천에서 6명의 동정 서원으로 시작된 「삼덕당」. 파리외방전교회 루이 델랑드(남대영) 신부와 6명의 정녀들이 작은 초가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삼덕당은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가 됐다.
초기 삼덕당의 6정녀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순택(우술라.90) 할머니가 힘들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지. 그저 작은 초가에서 아픈 사람들 약 주고 언덕에 작은 텃밭을 가꾸고 기도하고 뭐 그렇게 살았지. 그러다가 신부님께서 일본 후쿠오카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병원에 가라고 하셔서 일본으로 건너갔어』
낯선 땅 일본으로 간 김 할머니는 말 배우랴, 병원 일 배우랴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2년쯤 흘렀을까. 영천 경찰서에서 경찰관이 찾아왔다. 그들은 외국 신부를 도와 일본 병원에서 번 돈으로 독립군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할머니를 잡아 유치장에 가두었다.
『신부님 수녀님들하고 같이 갇혔는데 그 때의 어려움은 말도 못하지. 거기서 폐렴을 얻은거야』
열악한 환경의 유치장에서 병을 얻은 할머니는 병보석으로 출감해 영천 본가에서 요양하게 됐는데 그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다시 삼덕당으로 돌아가고 싶었지. 그렇지만 하나뿐인 남동생이 식솔들을 남겨두고 죽었지. 거기다 아버지께서 충격으로 넉달만에 돌아가셨어. 내가 당장 집안을 이끌어가야할 가장이 된거야』
결국 김 할머니는 집안 사정의 악화로 삼덕당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남6녀의 셋째딸이었지만 첫째와 둘째는 이미 출가를 한 상태라 할머니가 가장이 된 것이다.
『삼덕당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없는 대신 우리 가족들 먹여살리는게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라 생각했지』
작은 시골마을에서 어머니와 올케, 세 조카의 가장이 되어 안해본 일 없이 다했다. 보따리 장사에서부터 남의 집 밭일과 집안 일을 거들며 조카들을 먹이고 공부시켰다.
이렇게 힘들게 살았던 할머니는 그래도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도, 미사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에 손을놓기 시작하면 그분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거잖아. 그래서 힘들어도 아침, 저녁기도만큼은 꼭 하려고 노력했어. 10년 넘게 김영호 신부님의 식복사를 하게 된 것도 내 신앙을 좀더 다져보겠다는 마음이었지』
너무 힘들어서 삼덕당에 들어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예수성심시녀회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녀회가 된 상태였고, 가족들을 두고 입회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꼭 삼덕당에 들어가지 않아도 동정을 지키며 가족을 보살피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삼덕당 정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이라고 위안하며 살았다.
『주위에서 결혼하라는 사람들도 많았어. 어찌 안그랬겠나. 힘들고 어렵던 그 시절에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편하게 살았으면 했겠지.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과 남신부님께 평생 동정으로 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지금도 그렇게 산 것에 대해 후회 안해. 더 자랑스럽지』
몇해 전부터는 예수성심시녀회에서 할머니의 생존사실을 확인하고 혼자 힘들게 살아가는 할머니를 찾아와 말벗도 되어 드리고 청소도 해드리고 있다.
『종종 집에 있어도 없다고 해. 수녀님들이 와 주면 나는 좋지만 바쁜 시간 내서 찾아 와주는게 너무 미안해서 말이야. 나를 보고 수녀원 역사에, 영남 교회사에 살아있는 산 증인이라고 하는데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들겠어.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그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고 동정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야』
떠들썩하게 자신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겸손한 그 모습은 수도자의 모습이었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삼덕당에 들어갔지만 전쟁이라는 큰 소용돌이 앞에서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빙빙 둘러 지금까지 왔다. 수도복만 입지 않았을뿐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아온 할머니. 이제는 나이가 들어 허리 디스크와 백내장으로 힘들다며 하루빨리 주님곁으로 가길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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