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구상 시인의 시론(詩論)이 아니다. 같은 가톨릭인으로서 소박하게 시인의 「신앙」을 배우고 싶을 따름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젊은 시절부터서 모질고 처절한 구도의 길을 걸어온 구상 시인은 어느덧 가톨릭 신앙의 은총(恩寵)에 「두 이레 강아지 만큼」 눈 떠서 그 힘으로 살고 계신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시인의 언어이며 표정이며에는 「이것이 가톨릭이다」하는 소리 없는 웅변이 서려있는 것 같다. 몇 달 전 필자가 시인을 방문했을 때 폐 기능이 나빠져서 폐활량이 보통사람의 4분의 1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시인께서는 산소호흡기를 낀 채 기다리고 계셨다. 앉아 있기 조차 버거우실 정도로 기력이 없으신 분이 동안(童顔)의 미소로 환하게 맞아주셨다(요즈음은 병세가 악화되어 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가료중이시란다). 말씀 한마디 하기가 힘겨우실 텐데 오늘날 신앙인들의 종교적 성향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해 주셨다. 말씀을 들으며 노시인께서 가톨릭교회, 성사, 가톨릭사상,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삶)을 무척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느낌을 얻었다.
워낙에 잦았던 폐병치레에 익숙해서인지 노시인께서는 의식불명을 넘나드시는 극심한 천식증세의 와중에서도 「노경(老境)」을 노래하며 신앙의 의연함을 보여주셨다.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不滅)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
이런 시는 성찬경 시인의 시평(詩評)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존재와 삶에 대한 지혜, 위안과 평화를 얻게 한다. 위로받아야 할 분이 오히려 위로해 주며, 간병받아야 할 분이 오히려 멀쩡한 우리를 간병해주는 격이랄까.
노시인께서는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계시면서도 허송세월하며 음울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 따뜻한 미소로 희망을 속삭여 주신다.
『(상략)
아무리 오리무중과 같은 시대 속에서도/아무리 미혹과 방황의 표류 속에서도/아무리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아무리 실패와 좌절의 수렁에서도/아무리 파탄과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아무리 풍랑과 격동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굳게 굳게 믿으며 거기서 힘을 얻자.
그리고 그 님이 우리의 육신 속에/사람의 징표로 은혜롭게 심어주신/양심의 소리에 언제나 귀기울이며/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
▲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신앙인에게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이 있다. 설령 모든 것이 끝장나도 안길 품이 있다. 노 시인의 고백처럼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 번 진지하게 물어보자.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오리무중」, 「미혹과 방황」, 「칠흑」의 「어둠」, 「실패와 좌절」, 「파탄과 절망」, 「풍랑과 격동」에 휩싸여 있을 때, 그 때에도 우리가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 그 궁극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어도 우리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가톨릭 신앙인에게 그 답은 자명하다. 그것은 아빠(ABBA)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모든 것이 끝장나도 안길 품이 있다는 것, 노시인의 고백처럼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시인이 염원하던 「그 꿈의 동산」에 대한 희망 때문인 것이다. 태초에 충만한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을 영원한 「축복」으로 봉인하신 하느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희망을 우리는 현세도피요 내세지향의 신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엄연한 신앙의 실상(reality)이다. 그렇다고 현세의 삶을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 현세의 삶 속에 이미 내세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지도 사로잡히지도 않되 그 안에 싹을 틔우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이 땅에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노시인께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토를 달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양심의 소리」가 필경 「하느님」의 소리가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신앙에도 경지가 있다. 노시인께서 어느 경지에서 가톨릭 신앙을 사시는지를 일러주는 시가 있다. 바로「꽃자리」이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
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팔순(八旬)이 넘는 생의 연륜을 밟아 오신 분이 소년적인 감상에 젖어 그냥 짐작이나 바람을 압축하여 이런 시를 쓰셨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식되는 그대로, 체험되는 그대로를 언어화 하신 것이 이 짧지만 예지(叡智) 번득이는 시일 것이다. 이쯤 되면 노시인은 영락없는 랍비이시다. 추상같은 권위를 뿜는 틀림없는 신앙의 스승이시다. 그러니 들을 귀가 있는 신앙의 학동(學童)이라면 군말 없이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가 노상 가시방석처럼 여겼던 「시방 앉은자리」를 행복의 자리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로, 거룩하고 위대한 부르심의 자리로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방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일어설 때가 되었다. 자 이제 짐을 꾸리자. 떠날 채비를 하자. 노시인께서 주신 이 귀한 예지의 가르침들을 경종(警鐘)으로 가슴에 품고 제법 멀지도 모를 「이것이 가톨릭이다」 여정의 장도에 올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