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요, 인간은 논리적인 개념이나 관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실재로 정의합니다. 그러기에 실존주의에서는 「지금 여기에서의 주관적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 개념이 되는데 문제는 이 주관적 경험만을 강조하다보면 맹목적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주관적 경험은 다양한 의미의 관계성에 의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똑같은 일도 달리 평가하고 체험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일 자체」나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똑 같은 「사랑해」라는 말도 연인들 사이에서의 말에서는 사랑을 체험하고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반면 원하지 않는 사람의 똑 같은 톤의 사랑해라는 말은 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스런 자녀의 미소와 1000원을 훔친 자녀의 행동, 거기에 비해 모르는 아이의 미소나 1000원을 훔친 행동은 분명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도 다를 것이고, 그런 행동에 대한 평가도 분명 다를 수밖에 없는데 주관적 경험만을 강조하다 보면 이런 말과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논리적인 모습과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때로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강력한 힘 중의 하나인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관계를 넘어서는 의지적인 이해가 선행될 때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은 성숙을 위한 체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여 회당에서 가르치는데 처음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만 곧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단순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루가 복음사가의 의도는 단순한 고향에서의 일을 전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당한 사실, 더 나아가 초대교회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당한 다음 이방인들에게 전교한 근거를 성서적으로 뒷받침하고자 이 구절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오늘 복음을 보면서 우리가 시선을 두어야 할 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은 오늘의 우리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가지는 너무나 흔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결정적인 이유를 그들의 배타성에서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탄복합니다만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고향에서 해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렙다 여인에게 크나큰 은총을 베푸는 엘리야 예언자의 이야기, 그리고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고쳐준 엘리사 이야기에 고향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사의 비유나 예언자들의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나 메시아의 활동에는 「어떤 경계」나 「형식적인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특히 예언자들의 이야기는 이방인들도 예언자의 활동대상이 된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을 예수님과 관계해서 이야기해보면 예수님과의 관계(나자렛 사람들은 동향이라는 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동족)를 가지고 구원에 대한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다는 사실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배척 뿐 아니라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거부입니다. 이스라엘만이 구원되어야 하고,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배타성이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땅마저 「성지」로 존중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관계 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라운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관계에 집착한 그들의 배타성」은 이러한 「은총의 선물」마저 아무런 의미 없는 무엇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독소로 작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배타성의 해악을 지적하면서 인습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의지적인 이해를 우리에게 삶의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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